이 글을 읽기 전에 나는 이념적으로는 거의 극우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러둘 필요가 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고문기술자’로 더 잘 알려진 이근안 전 목사에 대해 언급하였다. 성서일과 주제가 ‘변화’였기 때문이다. 특히, 파문당한 그는 변화를 받긴 했던 것인가? 변화 받았는데 다시 돌아간 것인가? 아니면 아예 변화를 받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근안만이 아닌 우리 모든 이의 ‘변화’에 얽힌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근안은 약 39권의 저술을 남겼다는 점에서 남다른 변화를 이룬 사람인 것 같다. 그 중에는 기독교 원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 침술, 컴퓨터, 외국어에까지 이른다. ‘연합숭배’, ‘지상낙원’ 등 종교서적이 14권, 영문법, 영어단어장, 일본어 첫걸음 등 외국어 관련 자료 19권이 포함돼 있다. (중앙일보 관련 기사)

그의 전력은 다들 아는 대로 속칭 고문기술자.
1970년대에 경찰이 된 후 줄곧 대공 관련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탁월했다고 한다. 수 개월간 노동자로 위장 잠입을 하였는가 하면 색출해낸 대공용의자들을 학대하고 고문하는 방법을 통해 성과를 올렸다. 지난 2011년도에 작고한 고 김근태 전 의원이 그의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다. (이념적 보수측은 김근태의 지병과 그가 당한 고문을 분리하려 하지만 무리가 좀 있다.) 나도 보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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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이 붕괴되면서 10년 가까이 도망자 생활을 해오다가 잡혀 형까지 다 살고, 또 그 기간에 책도 저렇게 많이 쓰고 목사까지 되었는데, 이근안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문제가 된 것은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는 시기와 맞물려 그가 반공 강연을 하러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세상에 공개되면서이다. 강연 중에 자신이 간첩을 많이 잡았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애국자라고 했다는 말이 사람들을 자극하였다.

급기야 그에게 안수를 준 교단은 그가 약속을 안 지켰다며 부랴부랴 그를 파문하였다. 약속은 무슨, 불똥 튈까봐?

내가 만약 이근안 전 목사였다면 억울하기도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현역에 있을 때 했던 일이 오로지 독재자 한 사람이 시켜서 그런 것처럼 사람들은 돌아서서 말하는데 당대 다수의 국민도 그것을 용인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 대한 도피생활과 그리고 수형생활까지 마쳤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미션≫의 주인공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 사제는 노예를 잡아다 사고파는 칼잡이였다가 변화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자기의 여자와 정을 통한 동생과의 결투에서 동생을 죽인 죄책감으로 그는 굶어 죽기로 작정을 했다가 가브리엘 신부를 따라간 사람이다.

산 크를로스 선교회 소속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신부는 자기가 보낸 동료가 야만인 과라니족 선교에서 순교 당하자 자신도 순교를 무릅쓰고 들어가 결국에는 성공해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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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과 사랑의 지상 낙원을 건설하던 과라니족은 동족을 노예로 팔던 로드리고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은혜도 잠시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이권 다툼에 끼인 교황청은 이제 초토화 될 (다시 노예제도가 횡행 할) 그 땅에서 떠날 것을 신부들에게 명한다.

이때에 두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와 로드리고는 순종과 정의라는 기로에 선다. 로드리고는 당시 예수회의 절대 서원 4가지, 청빈·정결·순명·순종(교황께) 가운데 순종을 버리기로 작심한다. 원주민을 위해 칼로 싸우다 죽을 것을 택한 것이다. 성직자 되기 이전의 모습인 칼잡이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반면 가브리엘은 무력을 거부하지만 교회에 대항하는 비폭력으로서 힘을 자기 내면 속에서 발견한다. 무기를 쥐진 않았지만 인디오 마을을 떠나라는 교회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럼에도 막바지 날 전투에 나서는 로드리고가 축복해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축복기도)해줄 수 없소. 당신이 옳다면 하느님이 지키시겠지, 그러나 옳지 않다면 축복은 무의미해. 무력이 정당하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어지니까. 틀림없이 그럴 거야. 나는 그런 세상에서는 살아갈 힘이 없어진다오. 축복도 할 수 없소.”

결국 칼로 저항하던 로드리고도 죽고 비폭력으로 저항하던 가브리엘도 죽는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과연 로드리고는 자신의 변화 받기 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인가? 왜냐하면 다시 칼잡이처럼 칼을 들었으니까. 가브리엘만 순결한 것일까?

나는 로드리고와 가브리엘은 동일한 순교자라고 설교하였다.

둘은 폭력과 비폭력으로는 갈렸지만 불순종이라는 면에서 이미 합하였다. 그리고 그 불순종은 그들을 명령하던 당대의 진리 체계와는 갈렸지만 사랑이라는 본원적 진리에서는 벗어나지 않고 합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로드리고의 다시 잡은 칼은 더 이상 노예를 사냥하는 칼이 아니라 노예를 보호하는 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으려고 든 칼이었다는 점에서 가브리엘의 그것과도 어느 정도 유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복음과 진리가 같은 것임에도 유리를 가져오는 ‘시대’의 문제는 가브리엘과 로드리고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제들이 시달리는 문제이다.

이근안 전 목사가 제아무리 반공정신이 투철했다 해도 변화라고 하는 이 기독교 중추신경에 대해 착오를 일으켰던 건 아닌지, 아예 변화 받지 못한 채 목사가 된 것은 아니었는지 사려해볼 필요가 있다. 목사가 된 후에도 같은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목사가 된 사람 가운데 자신의 전력을 자랑하듯이 설교에 섞어가며 푸는 사람들이 꽤 되는데, 자신의 과거 전력에 대한 화신(化神)이 되어 있는 한 우린 모두 이근안이다.

오순절 계통의 사람은 함께 기도하여 ‘따따따따’ 방언이 터져 나오면, “됐네!” 하며 툭툭 털고 일어선다. 변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비 오순절 계통은 교리의 능통하거나 성경과 설교에 능하면 변화 받았다고 인준하는 경향이 크다. 이근안이 쓴 책 가운데 ‘성경 교리 연구’라는 책이 있었다.

변화 받지 않고도 쓸 수 있는게 ‘성경 교리’ 아니겠는가?

아래 책은 이근안이 저술했다는 성경 교리 연구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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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저, 성경교리연구

 

에필로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광채는 곧 복음의 광채라고 풀어 말했다(고후 4:5-6). 그리고 그 복음은 우리 자신의 과거 전력이나 전파하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우리가 사람들의 종 된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근안씨 부부가 근간엔 폐지 주워 연명한다는데…)

* 2015.2.15. 주현절 마지막주차 | 복음의 광채 | 성서일과, 마가복음 9:2~9. (cf. 열왕기하 2:1~12; 시편 50:1~6; 고린도후서 4:3~6.).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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