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문장을 마치 성도들이 가진 재물을 과감하게 청구도 하고 맘대로 가져다 쓸 수 있게 하는 구절로 가르치거나, 심지어 그런 내용과 제목으로 쓴 일개 간증책을 단체로 구입해 교회 프로그램에 접목하는 걸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프롤로그

본래 초대교회 설립자는 메시아가 볼품 없는 나귀를 새끼 타고 입성한 일에 대해 해명해야만 했다.

(1) 마가는 그것이 예언에 따른 것임을 그 나귀 새끼 주인의 반응을 통해서 입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누가도 그러했다. 그러나 (2) 마태는 별 저항 없는 나귀 주인의 반응보다는 예언의 인용 자체를 문헌적 자료로 입증하려 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대신 인용이 보다 명확하게 들어있다.)

한편 (3) 요한은 이런 일화에 의존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그 어린 나귀를 탄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지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사후 제자들의 뒤늦은 반성 속에 들어 있는 자료이다. 특별히 야유하는 군중으로 돌변할 이들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과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 예수님이 시행한 일곱 표적 중 가장 마지막 표적인 나사로의 부활을 11장에서 마친 다음 예수님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가 본격적으로 드리우는 12장이 ‘살아난’ 나사로와의 관계 속에서 이어진다.

즉 나사로의 장례와 예수님의 장례는 모종의 동형으로서 표적 가운데 가장 강력한 사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분을 죽게 만든 셈이다. 썩은 나사로를 살린 그 일. 부활.

그때 그들이 흔든 나뭇가지가 ‘종려나무’였다는 사실을 요한이 밝혀낸다. 다시 말하면 ‘종려나무’는 ‘나드 한근’과 마찬가지로 부지불식간에 드려진 장례 예식 중 하나였던 셈이다.

초대 이후 중세를 지나면서 이 종려주일이 꽃의 날(Dominica Florum)인 동시에 고난주일(Dominica Passionis)도 되는 것은 여전히 회중 자신의 이중성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이 장례 조의(弔意) 문구를 돈 버는 환금(換金) 장치로 전락 시킨 것은 지난 이천 년 이 도상에 관한 주석 가운데 최악의 이해일 것이다.

종려주일

고난주간

월요일부터는 고난 주간이다. 아래 일과에 맞추어 ‘기도→읽기→묵상(적용)→기도’를 실행하시길 바란다. 

시간제1 독서시편제2 독서복음서
사 42:1-9시 36:5-11히 9:11-15요 12:1-11
사 49:1-7시 71:1-14고전 1:18-31요 12: 20-36
사 50:4-9a시 70히 12:1-3요 13: 21-32
출 12:1-4, (5-10), 11-14시 116:1-2, 12-19고전 11:23-26요 13: 1-17, 31b-35
사 52:13-53:12시 22히 10:16-25 or 히 4:14-16, 5: 7-9요 18:1-19: 42
욥 14:1-14 or 애 3:1-9, 19-24시 31:1-4, 15-16벧전 4:1-8마 27:57-66 or 요 19:38-42
새벽출 14:10-31, 15:20-21시 114롬 6:3-11눅 24:1-12
부활절행 10:34-43 or 사 65:17-25시 118:1-2, 14-24고전 15:19-26 or 행 10:34-43요 20:1-18 or 눅 24: 1-12

경사와 애사

오늘은 종려주일(the Palm Sunday)이다.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인 종려주일은 환영을 뜻하는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 꽃의 날(Dominica Florum)로 불리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을 낭독하는 고난의 주일(Dominica Passionis)로도 불렀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최상의 환호를 보내던 무리의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이중성을 반영한다. 우리 모두가 지닌 종교적 이중성이기도 하다. 이 날에 대한 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은 그 강조점이 약간씩 다르다. 다음과 같다.

마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모든 복음서 기자의 공통점이다. 초대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간직했던 것은 이것이 저명한 예언자의 메시야 예언 일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마을에 있는 나귀를 미리 예지하셨고 그것을 가져오게 하되 그 주인이 막아 설 경우 어떻게 말하면 되는 지까지 일러주시는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통해 이 예언을 입증하려고 했다. 이 복음서에서는 무리들이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며 연호한다. (막 11:1-11)

마태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간략하게 보고하고 있는 이 예언을 명확하게 인용까지 함으로써(슥 9:9) 보다 명확하게 그 예언의 성취를 표명한다. 그러나 무리의 연호에는 마가와 달리 “나라”라는 말 대신 “자손”이라는 말로 채워진다. (마 21:1-11)

누가

마태복음에서는 그 나귀 새끼 주인의 반응을 생략하는 대신 예언의 인용 자체로 증언하고 있지만 누가는 마가와 마찬가지로 인용구 보다는 나귀 새끼 주인의 반응을 통해 이 사건을 증언하고자 한다. 그러고는 마가와 마태와 다르게 “나라”, “자손”이 아닌 “하늘”과 “지극히 높은 곳”을 연호한다. (눅 19:28-40)

요한

요한은 그 분의 입성을 “왕”의 입성으로 연호한다. 특별히 요한은 그들의 무리가 나사로 살리는 장면을 본 사람들과 연관을 맺고 있다. (요 12:12-16)

에필로그

사순절, 종려주일,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바로 그 후대 후예들의 ‘적용’이다. 이 기념 주기에 대한 복음서 간의 진술과 해석이 다른 것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으로 대변되는 공동체의 적용이 다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만약 네 저자의 표현과 진술이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면 그들은(또는 그들의 교회는) 주님의 부활 이후에 아무런 적용도 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뻔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적용’함으로써 오늘날 올바른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달하는 전거를 제공하였다. 우리는 어떤 적용을 하고 있나? 경사인가, 애사인가?

https://youtube.com/watch?v=_LRsDDky-eY

종려주일 | 경사와 애사 | 성서일과, 요 12:12-16, (c.f. 눅 19:28-40 사 50:4-9; 시 118:1-2, 19-29 or 31:9-16; 빌 2:5-11. (201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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