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스토커들
◎ 운전하다 차선을 바꿔가며 천천히 가는 앞차에 바짝 달라붙어서는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일부러 갑자기 끼어들다 급기야 운전자끼리 고성이 오간다.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자 화가나 아예 자신의 행선지를 포기하고 그 차를 추격한다. 신호등이 켜졌을 때 차에서 내려 창문을 막 두드리면서 욕설을 한다. 쫓기는 운전자는 저러다가 말겠지 했는데 계속 쫓아온다.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단순집착형 스토커다. ◎ 어떤 미남 가수를 좋아하던 10대 열성 팬이 그 가수와 스캔들이 난 여성 가수에게 혈서를 보냈다. “죽여 버리겠다, 오빤 내꺼다, 우리 오빠 건들지 마라!” 그 편지봉투에는 잘게 조각난 면도칼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 팬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 자기는 그와 운명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그가 그걸 못깨닫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다. 앞서 운전자보다 좀더 심각한 망상형이다. ◎ 매력 넘치는 A는 인기가 많아 남자가 줄을 선다. 그 중 하나가 B다. 점점 B가 별로였던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선 본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하고는 B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결혼 사실을 알렸다. B는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만나자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약혼자랑 같이 나와서 담판을 짓자고 해 하는 수 없이 약혼자에게 얘기 했다. “가자 해결해줄게-” 했지만 그날 차가 막혀 약혼자가 조금 늦었다. B는 그 사이 A를 잡아끌고 “너를 사랑하는 건 나 밖에 없다. 그 놈 안온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여자가 몸부림 치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골목에 있는 모텔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약혼자가 이 광경을 보고 차에서 뛰어 내려 B에게 한방 날렸는데 그가 쓰러지면서 보도 블럭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하고 만다. 약혼자는 졸지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세 이야기 모두 같기도 다르기도 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것은 열심있는 사랑에서 사랑 빠지고 열심만 남아 질투와 분노로 돌변한 예였다
프린서플 |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이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입니다. 이 지역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직접 설립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 사람들이 바울이 투옥된 소식을 듣자마자 뭔가 필요를 챙겨 보냈던 것같으며(c.f. 1:5; 4:10-19), 이 서신은 그것에 대한 감사의 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서신서들이 그렇듯 유대교 신앙의 그릇된 행위를 강하게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서를 함께 가르며 지나가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신앙을 확립하는 중요한 문맥의 구간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오직 믿음’에 반한, 배설물로 간주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할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표식이었습니다. 일종의 구원의 징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신분과 속된 신분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선택받은 민족은 이스라엘뿐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정식 회원으로의 가입은 할례로서 되는 것이었습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적 징표를 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막내이지만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될 당시 다윗 왕을 배출하는 가문인 유다와 함께 잔존했던 유일한 지파 였습니다. 다윗 왕에 앞서 이스라엘의 첫 군주 사울을 배출한 지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명망있는 족보도 버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스라엘과 히브리인은 어떻게 다른가. 헬레니즘 시대 당시 디아스포라 내에는 유대교로 개종해 들어오는 구성원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통해 개종합니다.) 즉 자신은 중간에 개종해 들어온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순수혈통으로서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순혈도 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바리새 운동은 헬라의 강대국에 신앙적 주권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신앙을 존속시켜준 평신도 정신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교회를 철저하게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준수했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 열심
모든 것은 버렸지만 하나는 남아 있었던 것같습니다. 바로 열심.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칫 열심히 사랑 하다가 분노와 앙갚음으로 변하게 마련인데, 바울은 반대로 분노와 앙갚음에서 사랑의 ‘열심’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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