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강퍅
강(剛) 뒤에 붙은 퍅은 ‘팍’이 아니라 ‘퍅’이 맞다. 괴팍하다는 뜻이다(愎). 그러나 정작 ‘괴팍’에서는 같은 한자이지만(乖愎) ‘퍅’이라 읽지 않고 ‘팍’이라고 읽는다. 원래는 괴팍도 ‘퍅’이라 읽던 말인데 편한대로 ‘팍’이라 읽다가 88년 맞춤법개정 때 ‘퍅’은 비표준어로, ‘팍’이 표준어로 규정되었다. 중국어로 愎을 bi로 발음한다 하나 광둥어 어휘사전에서 pih로 읽던 관습이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아 (우리 말 어휘 대부분이 그렇듯) 음가를 따오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같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약 45회나 사용되는 이 단어가 다른 역본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어가 우리 신체에서 발화되는 법칙을 설명하는 여러 언어 이론에 비쳐 볼 때 단순한 번역어가 석화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우리 신체가 이미 그런 인간을 대할 때 발화되는 감정과 느낌이 이 음가가 안내하는 자음-모음의 마찰과 잘 맞아떨어져 왔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 말이 아닌 게 아니었다. 아주 짜게 된 국을 ‘짜!’라고 해야지 ‘자!’라고 한다면 전혀 내 신체 반응을 속시원히 표현하지 못하는 이치다. 한 예를 더 들면, 시편 32:3의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한다”에서 이 ‘토설’도 대부분 번역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앞뒤 절인 2절과 4절의 문맥에서 볼 때 과연 ‘침묵’ 또는 ‘고백하지 않다’ 따위의 직역 수준의 표현이 ‘토설’보다도 가장 적합한 표현이었을지는 어디까지나 번역자와 설교자 양심 몫이다. 다른 말로 하면, 쉬운 표현이라고 해 채택하는 것들이 어떤 발음이나 이해의 쉬움을 표방하지만 실상은 죄에 대한 표현의 격함이 쉽고도 부드럽게 순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강퍅은 괴팍이 존속된 것과 달리 발음에서도 지고 의미에서도 지고 만 셈이다.
프린서플 | 어떻게 담대한가
여호수아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모세의 경우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탈출을 도모해 그들의 광야생활을 주도하면서 여정 가운데 만나는 적들과 간헐적 교전에 그쳤지만, 여호수아는 밖에서 안으로 직접 공격을 감행해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격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여러차례 ‘담대하라’는 말을 하십니다(c.f. 수 1:1-9). 원래부터 떨지 않는 담대한 용기의 소유자였다면 그런 강조가 없으셨을 것인데, 그 반복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여호수아가 스스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 담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담대함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금주 성서일과가 말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담대함이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 5장 9절에서 12절은 이스라엘의 담대함이 어디에 사용되었던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죄악이 관영하고 강퍅하기만 한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징벌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습니다(c.f. 창 15). 아울러 그 세속의 족속들과 구별을 표하기 위해 새롭게 행하는 할례와 유월절 제정이 바로 여기서(길갈) 한번 더 확인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경륜에 속하는 것이지 모든 전쟁의 살상의 명분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그 전쟁과 할례의 담대함이 어떤 막연한 선민의식으로 전락합니다.
에수님의 담대함에 저항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 2절은 그러한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당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견제 속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장남의 담대함처럼 변한 것입니다.
죄인과 식사를 하던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를 표명했다면, 본문에서 등장하는 장남은 바로 이 여호수아의 후손들인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죄인이라 함은 한 마디로 여호수아 군대에게 징벌의 대상이었던 그 세속 족속들 정도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담대함을 고수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에필로그 | 담대한가, 강퍅한가
결과적으로 여호수아의 담대함은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이스라엘에게는 강퍅함으로 석화된 상태였다면, 예수님 손에 들려서야 비로소 여호수아가 내리 받았던 본연의 담대함으로 복원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담대하거나 강퍅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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