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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emoth and Leviathan, watercolour by William Blake from his Illustrations of the Book of Job. His illustrations, that this monster was included, of Dante’s Divine Comedy were left unfinished upon his death.

이 글은 초대교회 원시 공동체들의 성령 인식 과정, 특히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독창적으로 인식했던 파라클레토스를 요약한 글이다.

우선 이번 주 성서일과 시편 가운데 이런 대목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성령강림절 성서일과에 웬 악어가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ㅡ시편 104:26

앞서 여러 차례 리바이어던 관련 글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괴 생명체들은 다 통일성 있는 것이라고 밝혔는데 그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뱀 리워야단(사 27:1)
· 하마 베헤못(욥 40:15)
· 놋뱀, 느후스단(민 21:9; 왕하 18:4; 24:8)
· 용, 옛 뱀(계 12:9; 20:2)
· 악어(시 74:14)
· 큰 물고기(창 1:21)
· 간교한 뱀(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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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popotamoc. Hippopotamus. Behemoth. Joh. Ph. Aubry fecit. [Frankfurt: Johann David Zunner, 1691.] Engraving, very scarce. Printed area 290 x 375mm. (11½ x 14¾”).
그것은 성경이 지목하는 통시적(diachronic) 악으로서 주체이다.
그러니까 악이란 전설의 고향 구미호 같은 악귀가 아니라, 일종의 집단 영성과 같은 것으로서, 특히 위에 열거된 구약 성서를 중심으로 한 악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하나님이 어떤 악마의 유혹을 고의로 창조했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집단으로서 영성까지도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견지로서 이다. 창조=지배(자).

이 리바이어던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초대교회 설립자들이 성령을 마치, 토마스 홉스의 ‘인공 혼’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가 그러한 성서의 이해 속에서 자신의 리바이어던을 빼내 온 것이다)

홉스가 중세교회의 암흑으로부터 독립된 온전한 국가 모델을 제시했다면, 초대교회의 설립자들은 제국으로부터 자유로운(제국에 부역하지 않는) 성령의 총체적이고도 통전적인 사역을 완전히 새로운 (자율 신경망의) 나라 개념으로 이해하고 기대한 것이다.

 

(2) 초대교회의 리바이어던

예를 들면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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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0여년 전만 해도 ‘성령의 은사!’ 하면 고린도전서 12장 한 곳으로만 통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로마서 12장이 부각되더니, 이제는 고전 12장을 소개할 때도 카리스마틱 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에틱 소개에 가깝다. 이 그림에서 고전 12장 은사 부분은 순복음 교회에서 설명하는 자료를 클리핑한 것인데 전과 달리 셋으로 분류함으로써 문안하게 소개됨이 인상적이다.

이는 각 공동체를 움직이는 작동 원리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다. (홉스가 하나님 없는 독립된 온전한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면 고린도 교회, 로마 교회, 에베소 교회는 사람의 의도로부터 독립된 온전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 표에서 유의할 것은 고린도 교회, 로마 교회, 에베소 교회의 구성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다. 왜 다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상황과 관련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곧 오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의 지체하심이었다. 즉, 재림의 지연이었던 것이다.

 

(3) 초대교회의 변화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고 하는 때에 이 사태를 어찌 할 것인가.

개인별 신비/ 카리스마틱 형태에서 점점 후대로 갈 수록 직제의 용모를 갖추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 장기전으로 가야하니까.

고린도 교회의 카리스마틱 은사 항목이  로마 교회에서 에틱 형태로, 다시 에베소 교회에서는 직제 형태로 변모하는 추이는 이를 반증한다.

그러니까 세속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령강림’이라고 하는 것은 지체되고 있는 재림의 상황에서 달리 대체시킬 대안 없는 교회 자신의 어떤 ‘운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겨진 자들, 내던져진 자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이는 믿음의 관점이다.

내던져진 자들이 체험한 바에 의하면 이 ‘운동력’은 양심이나 마음의 부추김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말한 마음에 새긴 새 계명이 결코 양심이 아니듯이.

 

(4) 요한복음의 성령, 파라클레토스

성령의 은사가 이와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 도표와 같은 직제 체제로(에베소) 점진적 변화를 갖추어 갔다면, 요한복음의 리바이어던은 매우 독립적이고도 독특한 것이다. 특히 이 공동체의 성령 이해는 가장 후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위 구성체들과는 달리 다음 네 가지로 집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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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Testify)

증언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현대교회가 지닌 증언의 요소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인가 마케팅인가.

기억(Remember)

‘기억’ 내지 ‘기억나게 하심’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원로들이 기억을 맡았는데 이 공동체에서는 성령께서 그 기억을 담당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cf. 14:26)

그러나 읽은 게 없다면 결코 기억날 것이 없다. 들은 게 있어야 기억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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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꾸짖음(Judgment/Mediator)

책망은 비난이 아니라 꾸짖음을 말한다. 이 책망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범주는 세 가지, 죄, 의, 심판.
이 말은 기준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다는 뜻이다. 죄의 기준, 의의 기준, 심판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다른 죄는 의미가 없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다. 의의 기준도 어떤 옳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로 달라진다. 심판도 그 어떤 세목에 대한 심판보다도 훨씬 앞선 것이다. 이 모든 기준에는 ‘선재’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께서 창조 이전에 계시듯 모든 규정에 앞서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가정할 때, 동성애를 하면 벌 받는 게 아니라 동성애 자체가 벌이라는 선재적 규정과 같은 예이다.

위로(Comforter)

위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위로라는) 성질은 파라클레토스라는 이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연민이나 자기애와는 구별된다. (다만 자기 연민과 성령의 위로를 구별은 어디까지나 위 2)항과 연하여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네 요소는 (홉스의 표현인바) 이 공동체의 인공 혼, 인공 관절들에 해당한다.

 

(5) 파라클레토스는 왜 다른가?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다른 서신서 공동체에 비해 상당히 독특한 성령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왜일까?

그것은 이들의 성령 인식이 앞서 다른 서신서 공동체와는 달리, 이들 자신이 ‘출회’된 경험 공동체라는 사실을 그 요인으로 갖는다. 예수께서는 파라클레토스 소개를 이런 예지 속에서 전개하신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ㅡ 요 16:2

출회란 회당에서의 축출을 말하는 것이고, 회당은 전통 유대교로만 알기 십상이지만 여기서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은 같은 (예수를 믿는) 공동체로부터의 축출로 이해하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이해이다. 바로 그 사실이 이들로 하여금 더 절박하고 더 급진적이면서도 더 세밀한 성령 이해로 선회하게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오늘 날로 말하면 ‘교회에서 쫓겨난 교회’ 공동체라고나 할까?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과격한 인식은 거기서 비롯된 셈이다.

에필로그.

그러니까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성령의 이해는 종말론적으로는 가장 후대에 위치해 있지만, 예수에 대한 이해로서는 가장 최전방에 섰던 공동체만이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한 유일한 복음서라는 사실과 일치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 파라클레토스의 위로(comfort) 개념을 설파함으로써 신자들을 위로하고자 했을 때, 일체의 증언력(testify) 없는 신자들에게는 어떠한 은혜도 끼칠 수 없다는 당황스러움이 이 기묘한 리바이어던의 영성을 방증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세속적인 정서적 위로를 한 후에, 파라클레토스의 위로(comfort)라고 명명하는 것은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그릇된 사용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 이 글은 반드시 함께 읽을 글은 리워야단과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리고   노우호 목사의 악령 방언(γλώσση)설은 다 옳은가?
* 2015.5.24. 성령강림절 | 제목: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 | 성서일과, 요 15:26-27; 16:4b-15. (cf. 행 2:1-21; 시 104:24~34, 35b; 롬 8:22~27.)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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