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의 본말

노아의 방주의 본말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 매장되었다며 찾아 헤매는 노력은 실로 허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방주가 지닌 ‘본말’ 보다는 그것을 채증해보이겠다는 ‘과학’에 대한 맹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맹신은 대개 방주를 축조해낸 한 ‘가정의 이야기’라는 본말 대신에 그 방주의 크기에 더 관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발굴한 방주가 생각 보다 작으면 어쩌려고? 아니 이미 발견했지만 생각보다 작아서 죄다 내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1)

우리나라 경인운하에 <아라뱃길>이라는 유람선 코스가 지난해 5월에 생겼다. <아라>라는 말은 <바다>의 옛말로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순수 우리말인 <알/아라>가 “아주 넓고 큰 곳”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바다>의 옛말로는 <바랄>이 있기 때문이다.

(2)

<아라>는 히브리어로는 땅이라는 뜻이다. 흙으로서 땅(에레츠)이라기보다 세계/세상이라는 의미로서 땅이다. 하나님 은총의 부재는 줄곧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지는 혼돈으로 나타났다가(천지창조, 노아의 홍수, 홍해…etc), 은총이 임할 때 다시 그 경계가 생겨나곤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아라랏>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땅과 물의 경계인 그 방주(Ark)가 떠돌아다니다가 정박한 산의 지명일 수 있지만, 아라랏이라는 의미 자체에 담긴 노아 가족의 산행(山行)은 이미 세상과는 구별된 항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 <아라>라는 음소에 담긴 의미가 이와 같은 ‘바다’라는 빠롤을 품고서 우리나라의 랑그에게까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라뱃길…
 

(3)

나는 아르메니아의 한 도심에서(Armenia Kotayk) 바라본 아라랏 산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서는 그 산 자체가 마치 방주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대에도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약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가 그 산과 일체를 이룬 그 어떤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거세게 몰아닥치는 홍수를 항해했던 그 방주는 바로 그 산(山) 자신일 수도 있었겠다는 극히 실존론적 결론에 다다른다.

노아의 신통력이 현대식 잠수정을 만들었을 것으로 기대하는 현대인과 몇몇 과학자들의 이상한 상상력을 무참히 파괴하는 논지라 미안하지만, 바로 이 방주는 그 <아라>가 가진 기원에 더 충실하다.

<아라>는 땅인가? 바다인가? 아니면 땅이면서 바다인가?

이리하여 노아의 방주는 “더럽혀진 ‘땅’을 항해했다”는 음소(音素)가 지닌 본말의 탈환이 이루어진 셈이다.
 

(4)

게다가 이러한 음소의 탈환은, 노아의 방주가 1년여를 떠돌다왔는데도 출항했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돌아와 정박한 것만 같은, 다소 당혹스런 대목을 (잠수정을 그려가며 해명하려는) 창조 과학자들보다 더 잘 설명한다.

그렇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그 자리에 고정된 채 1년을 항해했을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산에 고정된 방주가 급한 물살들을 항해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5)

이 음소 탈환의 목적은 과학이 수여하는 헛된 망상을 제거하고 그 이야기의 본말에 관심케 하기 위한 일종의 기도(企圖)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본말은 이렇게 전하신 바 있다.

(가) 홍수전에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다. (마 24:38) : 성경은 방주의 실측 크기를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의 본말은 노아의 가족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 보다 본말은 거기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38b절) :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음만 보고 결혼하던 혼잡과 그 시대 자체의 폭력성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라는 평범한 일상으로 주석하셨다. 즉 구별이 없었음이 본말인 것이다.
(다) 홍수가 나서 모두 멸망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39절) : 당시에는 비라는 것이 오지를 않았다. 성경은 안개만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5).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재앙의 전조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경험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경험을 우선시 하는 믿음은 계시를 믿지 않는 태도의 기본 양식이며, 그런 태도는 물이 목까지 차오를지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식의 마비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법.

(6)

방주는 한번도 배(ship/오니야)였던 적이 없다. 성서는 배라고 하지 않고 시종일관 방주(테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잠수함’이라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Box(궤)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 궤는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을 담은 용기였으며, 시온 산 예루살렘에서도 그 용기에 그렇게 담아두었다(cf. 사 2:3).

여기 아라랏 산이 그 가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에필로그 | 공학적 상상력 Vs. 문학적 상상력

이와 같은 상상력은 노아의 방주를 현대식 잠수정으로 설계하고 재현해내는 공학적 상상력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종의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해두자.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창조과학과 같은 식의) 공학적 상상력에 더 내맡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만약 도킨스(Richard Dawkins)와 같은 사람을 만나 논쟁을 하다가 말문이 막히거든 바로 그 때, 이 문학적 상상력을 한번 꺼내보시기를-.

* 2013.12.1일자 | 노아의 방주의 본말 | 마 24:36-44. (cf. 사 2:1-5; 시 122; 롬13:11-14.)
* 이미지 참고: 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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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도상해석학과 신학의 지평융합: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Post Secular 새교회 새목회 (2013). | Fb/@pentalogia Twtr/@pentalogia | You can add my to your circles. 로 연결해 보세요.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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