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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좌파와 우파, 극우와 극좌

우파/좌파라는 용어가 갖는 현대적 개념은 프랑스의 혁명기에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국민회의 당시 쟈코뱅이 좌측에 앉았다 하여 좌익, 그리고 그에 반한 지롱드를 우익으로 부른데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쟈코뱅 측은 소시민 계급 보호를 왕권폐지나 재산권 간섭을 통해 구현할 정도로 급진적이었지만, 지롱드 측은 대개 완만했다. 자유경제를 통해 지주의 재산권을 보호했고 왕권의 전면폐지 대신 입헌 왕정제로의 절충을 모색했다. 오늘날도 이런 기조들은 나라와 민족이 달라도 그 정치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즉 좌/우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언제나 그들이 극으로 치달을 때 발생한다. 
  우선 우리 국가가 경험한 극좌는 당연 공산주의이지만 그 중에서도 아나키즘을 가리킨다. 그들은 정부와 체제를 전복시켜 이른바 꿈의 자치체 형태인 완전공동생산을 기대한다. 자유지상주의인 셈이다. 한편, 우익은 그 성향이 완만하다지만 극을 띠게 되면 이도 역시 아나키즘에 댈게 아니다.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가 바로 그 예이며 이들은 대게 민족주의이기에 지정학적 기반에 의존해 오늘날에도 생존해 있다. 남-북한이 전쟁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떠드는 일본의 길거리 단체나, 유럽의 신나치즘이나, 심지어 자유민주주의 상징이라는 미국서 조차 백인우월주는 그 잔재들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의 경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모티프와도 관련 있는 <시오니즘>이란 것을 타고 현대적 극우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오니즘 곧 시온주의라고 하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적 용어가 아니다, 

프린서플 | 좌파적 신앙과 우파적 신앙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오려던 시도는 역사적으로 오랜 것입니다. 주전 5세기로부터 제2성전 시기의 성경 편찬과 함께 진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들이 세계적으로 명실상부한 어떤 ‘국가’로서 건국에 성공한 것은 1948년이 처음이며 그것은 19세기말 본격화 된 민족주의 운동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 의미로서 시온주의는 대단히 현세적인 것입니다. 유럽발 반유대주의 정서는 차치 하더라도 무엇보다 비윤리적이라는 저항에 부딪쳤으며 심지어 유대인들 내부에서도 ‘국가가 사람의 손으로 재형되는 것이 야웨께 죄’라는 생각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은(M. Wylen Stephen)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같은 극우주의자들의 광적 행위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어쨌든 시오니즘이라는 것은 실현 된 셈입니다. 하지만 그 시온의 궁극적 왕인 예수님은 자기 국가관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v. 36).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였다면 부하들이 싸워 자신을 넘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은 단순한 수사로서 표현이 아닙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땅에 오시기 전 약 164년경 발발했던 맛다디아스라는 제사장과 그 아들들(유다/마카비우스, 요나단)의 외세에 대한 대처는 현세적 이스라엘 운동의 대표적 예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메시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분이 왕이셔야 그 분의 나라입니다(v. 37a).
시온이라는 말은 다윗 왕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가상의 산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가 사실상 끊이게 됨으로 다른 의미로 쓰임새를 갖게 됩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현세적 제왕이라는 민족적 형태로 재형 해내었고, 다른 어떤 유대인들은 단지 전통의 형태로만 봉인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빌라도 손에 죽으신 바로 그분의 왕 되심을 지목해야만 바른 쓰임일 것입니다.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v. 37b).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진리에 관심 갖고 던진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태도로 방관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가 왕인 줄도 알았고 진리에도 관심했지만 자기 구원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한 그 모든 자들의 예인 것입니다.

에필로그 | 시오니즘 이데올로기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국(國)의 민간인에게까지 실행되는 극우적 공격을 일종의 신앙적 시오니즘에서 해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테러에 상응한 당연한 ‘신앙적’ 조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구속사적 향수에 둘러싸인 오해로서, 그리스도교 정체성으로 건국된 미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이스라엘을 일종의 원조 격으로 받아들이는 막연한 열등감 과정에서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적 시오니즘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작가에 의해 처음 쓰인 근대적 개념어로서, <자기 해방>이라는 이념에서 창출된 말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살상행위는 구속사적 명분이 될 수 없으며 그런 종교적 명분이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빌라도와 같은 방관자적 신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민족적 극우 정치 속에서 전개되는 살상 자체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관점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incentcho&logNo;=100088094648&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http://altrapoint.com/2011/09/zionism-up-close/
http://www.davidicke.com/articles/political-manipulation-mainmenu-72/42734-they-dare-not-speak-its-name-rothschild-zi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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