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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다빈치와 몬드리안
위 도형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통계적으로 거의가 다섯 번째 사각형을 고르는데 이른 바 황금비(1:1.618)라고 부른다. 가장 균형 잡히고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책, 창, 명함, 신용카드…, 온갖 실용 디자인의 표준비율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일찍부터 여기에 관심해 자기 작품에 적용했다. 밀로 섬의 아프로디테, 2500여 년 된 파르테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모두 이 비율을 썼다. 특히 다 빈치는 이를 위해 수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물론 20세기 들어서도 황금비 작가는 있다. 몬드리안이다. 그러나 그는 다 빈치와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구사했다. 풍경을 그리더라도 어떤 도형의 조합/분할로 결론 맺는다. 형태뿐 아니라 색상도 원색으로 정리되었다. 소위 황금비의 극단적 재구성인 셈이다. 사실, 두 화가 모두 황금비를 겨냥해 그렸는데 어째서 그런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일까? 다 빈치의 경우는 사실과 똑같은 그림을 위해 황금비를 썼다면 몬드리안은 그 사실적 장면들 속에서 황금비만을 부각해 사실을 그렸다. 육안으로는 모나리자가 더 실사로 느껴지지만 시각은 어차피 왜곡임이 훗날 규명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작품이 자연(nature)에 충실했다고 말하는데 누가 더?

프린서플 | 듣기만 하다가 보게 되었다는 것
본문에서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됩니다. 이를 두고 “그것은 그가 영적인 마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그 의미만 강조되고 실질적 신유는 모호한 게 되어 예수님의 실제 이적과 그 권능은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반면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추상적인 의미가 아닌 확실한 실제에 놓고 기도해 마침내 정말로 그 맹인이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 “눈을 떴다.” 라는 사건은 실질적으로 나타난 체험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그 신유 당사자가 신분을 망각하고 그 이적을 토대로 과도한 부를 축재했다면 결과적으로 그 의미의 눈은 도리어 맹인 된 상태로 전락되었다 할 것입니다. 어쨌든 두 결과를 놓고 볼 때, 마음의 눈을 뜨든 실제 눈을 뜨든 확실한 것은 “보게 되었다.”라는 사실 입니다. 그 사실 만큼에는 이천년 아니라 일만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본다”는 말에는 다음 몇 가지 차이들이 있습니다.  

첫째, 시각/시력으로 보는 것입니다. (SEEING)
우선 창세기 첫 장의 표현대로 땅을 볼 수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물, 바다.., 각종 식물들이나 창공을 나는 새,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여러 생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지켜보는 것입니다. (WATCHING)
본다고 하는 것에는 시각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어떤 장면들이 ‘되어가는’ 상태를 파악하고 보는 것, 그것은 단순한 시력 이상의 것입니다. CCTV 모니터 보는 것은 SEE라고 하지 않습니다. WATCH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전 재건을 할 때 그 성의 문을 교대로 지키게 했으며(느 7:3),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하신 것도 이 의미로서의 ‘보는 것’입니다.

셋째, 발견으로 보는 것입니다. (FINDING)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타는 불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한편, 다윗 왕조가 야웨를 섬기는 민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내내 타락해 가다가 요시야 왕 때에 비로소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모세의 율법 책이 발견됩니다(대하 34:14-15). 그것이 바로 개혁으로 연결됩니다. (그 동안 율법책을 잃어버리도록 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예화에 소개된 밭에 감춰진 보화도 역시 ‘발견’해야 얻을 수 있는 보화였습니다.

넷째, 깨달음/앎으로 보는 것입니다. (PERCEIVING)
신구약에 걸친 유명 인용구 하나가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욥은 오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로써 우리 인간의 시력(See/Sight)에는 지켜보는 것(Watch), 발견하여 보는 것(Find), 통찰하여 보는 것(Perceive)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시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서 맹인 바디매오와 욥, 이들 두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특히, 욥은 마지막에 가서 “my eye sees you” 즉, I SEE YOU라는 정답을 하나님께 내놓음으로 그 지루한 여정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지루하다고 한다면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I SEE YOU.


에필로그 | 황금비율

아프로디테나 모나리자 식으로 보든 몬드리안의 분할 식으로 보든, 중요한 것은 기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그마가 그 기준인 줄 착각하나 사실은 그 기준을 도리어 자기 식으로 ‘형성’한 그것을 도그마로 가져가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그마 – 아니 사실은 도그마가 아니라 진리 – 그것은 오로지 ‘비율’ 그 자신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라는 말로도 번역되지만 ‘비율’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황금비(The Golden Ratio)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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