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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이승만 커버스토리:
이승만은 국부인가?

이승만이 TIME지 커버스토리 모델이 된 것은 총 2회이다. 한 번은 1950년 10월 16일 그러니까 6·25가 터진 뒤 3개월 후이고, 또 한 번은 1953년 3월 9일, 즉 정전협정 4달 앞두고서이다. 이 글은 그 첫 번째 편이다. 두 번째 편을 이 글을 참조. [역자주]

이승만 타임지 커버스토리

원제: Father of His Country?
발행일자: Monday, Oct. 16, 1950

자기 나라에서 난민으로 3개월을 지낸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Syngman Rhee)이 서울에 돌아왔다. 그는 패전한 공산군이 쓰레기 더미로 어지럽힌 그의 관저를 찾았다. 소련 신문 이즈베스챠(Izvestia) 뒷장이 나뒹굴고 있었다. 쓰레기가 치워지고 대통령 숙소에 대한 정밀 수색이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공산당이 점령한 동안 그곳에 주둔했던 러시아 민간인은 이승만 부부의 가장 소중하고 화려한 소유물은 챙기지 못하고 내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겨울에 북쪽으로 도망치는 러시아인이 여사의 겨울 외투뿐 아니라 속옷까지 훔쳐 입고 달아나는 바람에 영부인 프란체스카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승만의 지난주 일과는 규칙적인 패턴으로 돌아왔다. 매일 아침 6시 30분 기상하고, 그러고서 서양식 아침 식사를 ─ 주로 커피, 과일주스, 시리얼, 계란들로 된 ─ 들기 전 잠시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대통령을 방문한 손님에게는 대개 필리스 시가(Phillies cigar) 또는 한국 담배가 제공되었다. 이승만 자신은 건강상의 이유로 거의 시가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욕실에서 혼자 있을 때만 그걸 피웠다. 한 방문객은 미제 사탕을 선물로 받고서 감사하기도 했다. 일과가 끝날 때쯤이면 이승만은 눈에 띄게 지쳤다. 밤은 그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그에게는 불면증이 있었다.

그렇게 지친 이승만의 어깨에는 한국의 재건과 통일(a revived and unified Korea)의 희망이 달려있다. 이승만의 강력한 반(反)소련 노선은 자연스럽게 그를 코민포름(공산주의 선전기관: 역자주) 선전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그를 반대하는 소요는 진보주의와 노동자 진영 특히 프랑스, 호주 그리고 인도 안에서 거셌다. 미국에서는 마치 순수하면서도 의심 없는 사람들이 중국의 장개석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그런 종류의 비방 캠페인이 그를 괴롭혔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때때로 자기를 반대하는 자의 인권을 임의로 억압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인물이기도 했다.

1) 그는 철저하게 반공이었다.
2) 그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3) 그는 공정하게 선출된 대통령이자, 오늘 또 다른 투표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 다시 선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방식과 방법에 관한 자국민의 평가가 어떻든 미국과 유엔 회원국은 이승만과 함께 일해야만 할 것이다.

삽과 빗자루

지난주 서울 시민은 자기네 대통령처럼 그들의 익숙한 방식으로 파괴된 나라의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미국의 지프, 탱크 그리고 트럭의 경적 소리로 혼란한 가운데서 수없이 많은 한국인 노동자 폭력조직들은 전쟁 잔해에서 쓸 만한 고철을 슬그머니 골라 갔고, 퇴각한 빨갱이들(the retreating Reds)이 버리고 간 모래주머니로 만든 수레에 작은 파편들을 실어 날랐다. 미국 대사관 앞에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사탕을 달라며 미군 병사를 졸라댔고 어른들은 청원서를 들고나와 미군 장교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영어를 좀 할 줄 압니다. 통역으로 미국인과 일하기를 원합니다. 부탁합니다. 빗자루도 없고 삽도 없습니다. 제발 일을 주십시오.”

자칭 통역자의 대부분은 ‘엔지니어’로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것은 그들이 삽과 빗자루를 다 받고서 서울의 잔해 현장에 일하러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에 걸맞지 않은 직함이었다.
암시장은 비누, 모피 코트, 미군 돼지고기와 콩, 스트렙토마이신[결핵치료제: 역자주] 매매를 위한 흥정으로 붐볐다. 공산주의자들은 암시장(the black market)을 근절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렇게 지나치게 규제해서는 정상적인 시장(the white market)의 숨통마저 끊어놓을 뿐이었다.

서울은 복구를 마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기만 했다. 도시의 60% 이상이 파괴된 상태였고 재건축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식수원이 없었다. 주 전력원도 없었다. 전차는 선로에 그대로 서 있었다. 철길에는 폭격으로 타버린 화물차들이 수백 대가 누워 있었다.

한국은 전국이 수도 서울의 문제를 함께했다. 교두보였던 부산에서는 4백만의 시민이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지난주에 2백만 명의 난민을 추가로 받았다. 의식주가 부산과 미군에 달려 있었다.

북한에서의 전쟁은 만주 국경을 향해 치열해지면서 이미 그 공화국은 악으로 비대해진 빨간 얼굴의 소련 총독 슈티코프(Terenty Shtykov)가 장악했고, 그리고 뚱뚱하고 졸린 눈을 한 한국의 공산주의 수괴 김일성이 권좌에 올라앉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에 대한 분배’와 ‘산업의 국유화’를 명목으로 땅을 몰수해갔다. 그 소유권과 보상에 끝없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승만은 북한군에 대한 보복 금지 정책을 발표했지만, 공산당 지도자에 대한 처벌과 교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선비이자 학자

미국과 유엔 양측은 모두 한국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CA[경제협력국: 역자주]는 이미 최선의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좋을지 설문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인의 눈에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선적 책임이 저 백발의 이승만(이승만의 성씨인 Rhee는 Bee[꿀벌]를 연상시킨다)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선비였던 그의 조상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오랜 민족의 전통을 따랐다.

이승만이 태어난 75년 전은 한국 귀족만을 위한 불변의 법칙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이들에게 신사[선비]란 학자이어야만 했고, 학자들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법칙이 지배했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1392년에서 1910년까지 한국을 통치한 이씨[이씨 조선]의 후예였다. 그는 아들이 중국어와 유교식 전통 안에서 한국 선비 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승만은 전통 학문을 배우는데 열심이었다(그는 여전히 중국고전시를 쓴다). 젊은 학자들이 관료로 등용되는 한국의 국가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 학문적 성공에도 이승만은 당장 정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1895년 한국은 독립 상태였지만 러시아와 일본 제국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영민하게도 이승만은 서양 교육과 영어로 된 지식이 결국에는 미래의 한국 정부에 유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서울에 있는 배재대학교와 감리교 선교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배재대에서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서양의 정치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추밀원과 교도소

이승만은 한국 군주제와 입헌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는 민족주의 조직인 독립협회에 합류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의 발간을 도왔다. 그것은 한국 내에서 영향력이 증대 되는 일본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매체이다. 독립협회가 투쟁을 표면화할 무렵, 사악한 황제 고종(the bedeviled Korean Emperor Kojong)은 추밀원(중추원)에 이승만을 임명했고, 그 협회 지도자 17명 이상을 감옥에 잡아들였다. (이승만은 후에 그들을 풀어준다.) 1897년 이승만은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의 데모를 주동함으로써 추밀원 위원으로서 권한을 월권했다. 그는 곧바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최고 등급 정치범을 위해 마련된 처우를 받았다. 팔에 기름종이를 두르고 연소시키기, 삼각 막대로 때리기, 손톱을 으깨는 따위의 고문을 매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20파운드[약 10kg]짜리 칼이 걸려 있었고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6개월 후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그것으로써 그가 받던 고문은 중단되었다. 이승만은 다른 감옥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그는 신문 게재를 위해 글을 밀반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그는 감옥에 있는 여러 해 동안 <독립정신>을 썼다. 이승만을 민족운동의 영적 지도자로서 정립시킨 이 책은 한국 애국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이 무렵 이승만은 중국의 장개석처럼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하버드와 사냥개들

이승만이 감옥에 갇힌 지 7년이 지난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혼란 가운데 민족주의 단체가 한국 정부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풀려나 새 정부의 특사로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주선한 러일 평화회의에서 한국이 일본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다. 이승만은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에서 “(루스벨트가) 자기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이 평화 회담에 참석하고자 하는 이승만의 요청은 거절되었다. 포츠머스조약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실상 한국에 대한 보호령을 획득했다.

그의 임무가 실패한 뒤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면서 서양식 교육을 이어갔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A.B.)를 취득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M.A.)를 받은 후, 박사 학위(Ph.D.)를 받기 위해 프린스턴으로 갔다. 프린스턴 대학원의 학장이 그의 학력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이승만은 자신이 1년 동안 라틴어를 공부했다고 말하며 ─ 그것으로 자신에게 충분해 보였다 ─ 일반적으로 독일어와 그리스어를 요구하는 학제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내 모국어 외에, 나는 훌륭한 작가로 알려져 있고…중국 문학, 고전, 역사, 철학, 종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일본어,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도 나의 외국어로 간주해야 한다.”며 약이 오른 듯 기록으로 남겼다. 이승만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성”(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일본이 한국 황제를 폐위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의 제국으로 합병하려던 해인 1910년, 이승만은 측면에서 정치적 소요를 제기하는 YMCA 활동가로서 한국에 돌아왔다. 모든 기독교인을 불신하던 일본은 특히 이승만은 갑절로 불신했다. 그들은 윤평희라 불리는 경찰 정보원을 이승만의 영원한 그림자로 고용했다. 그는 일본에 은밀히 부역하는 한국인들, 즉 악질적인 ‘사냥개들’ 중 하나였다. 원초적 심리전의 전문가였던 윤평희는 부지런히 이승만에 관한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하루 이승만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YMCA에서 빌린 작은 방에서 잠을 자고 외박한 일이 있었다. 그날에 있었던 일을 이승만은 이렇게 술회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YMCA 건물로 오셔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묻고 다녔습니다. ‘당신들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는 있소? 그들이 그 애를 고문하고 다리를 부러뜨렸답니다. 윤평희가 나에게 말해줬소.’”

아마도 윤평희의 활동은 일본이 이승만을 투옥하기로 해놓고서 영구적인 처분을 내리기에 앞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잡아들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1912년 선교사 친구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6개월 동안 한국을 떠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하와이를 향해 항해했다. 그곳에서 작은 한국인들 부락의 지도자로 정착했다.

유교와 관

한국에서는 사라지고 있지만, 이승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몇 년 후 그는 “나는 유교 가정에서 났고 자연스럽게 평화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이승만에게 내재된 유교의 평화주의는 기독교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비폭력 세상을 주창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이상주의적 비전’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에서의 ‘소극적 봉기’[비폭력 봉기]는 미국과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자기 민족이 어떤 의식을 지녔는지 알게 하는 것이었다. 1919년 한국에 남아 있던 저항 지도자들은 이 봉기를 모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이 같은 이승만의 견해가 좌지우지 한 대한민국 독립 선언문과 그에 따른 다음 강령은 모든 마을에 배포되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일본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돌을 던지지 마십시오.
주먹으로 때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야만인이 하는 행위입니다.”

1919년 3월 1일 사람들은 독립 선언문 낭독을 들으려고 모였다. 금지된 그들의 태극기 깃발 그리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로 큰 물결을 이루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조용히 해산하고 집에 가 있기로 했다. 더 많은 장소에서 확산시킬 기회를 절대로 갖지 않았다. 일본군은 군중을 향해 가차 없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소방용 갈고리로 그들 희생자의 신체를 훼손했다. 일본의 ‘소탕작전’(mopping up)이 있던 그 피의 주간에 20만 명의 한국인이 붙잡혔고 7천 명이 죽었다.

이 ‘소극적 혁명’은 외국의 작은 동정을 이끌어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 애국자들의 투지를 강화시켰다. 1919년 말 한국의 독립 지도자들과 망명 중인 한국인 연합체들이 상하이에 모였다. 일본에 의해 이승만 목에는 현상금 30만 달러가 걸렸다. 이를 노리는 중국 공안에 잡힐 우려가 있던 그는 시신처럼 관속에 실려 상하이의 세관으로 밀입국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을 돕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컨퍼런스 & 크로케

향후 20년간 이승만의 삶은 대개 망명한 정치인들이 겪는 좌절감에서 오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헛된 노력에 불과했지만, 그는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해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미국 정부는 베르사유조약 회담과 군축회의에 참여하려는 그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존재가 일본인에게 거슬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망명한 다른 한국 정치인들과 다투었다. (이승만은 지속해서 비폭력적 저항을 주장했고, 다른 지도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선호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임시 정부란 존재하지를 않았고, 이승만은 중국에 있는 중앙정치국을 한국의 정치적 암살자 김구에게 넘겨주었다.

1934년 이승만은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에 만났던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다. 이승만보다 20세가 어렸다. 프란체스카는 매력적이고 쾌활했다. 그녀는 터무니없는 남편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1941년 이승만은 이르기를 “내가 외국 여자와 결혼했을 때, 내 친지들은 매우 불쾌해했지만, 그들은 완벽한 결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파티에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다. “자, 이제 그만이요! 당신은 충분히 얘기했어요.”

1939년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이승만이 미국 내에서 임시 정부의 미국 대표 및 모든 한국인 활동가들의 결정권자로 일하던 곳이다. 합리적인 인상을 주는 시설을 구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16번가의 치장용 벽토로 된 방 12칸짜리 집을 샀다. 평범하게 살았으며, 서양 주류는 마시지 않던 이승만은 이따금 담배를 피운 것 말고는 워싱턴의 흔한 칵테일 파티도 피했다. 대부분 그의 일과는 한국의 독립과 임시 정부의 국무성에 관심을 쏟는 데 집중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냉담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진주만 침공 이후 이승만이 미 국무부에 자신의 신원 증명을 우편으로 보냈을 때, 그는 그것들을 와서 도로 가져가라는 요청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워싱턴에 사는 동안 여가의 대부분을 옥외에서 보냈다. 잔디 깎는 일을 매우 좋아했고 일요일 오후 포토맥(Potomac)강에서 빌린 노 젓는 배를 타고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내와 함께 하는 테니스 외에 그의 유일한 스포츠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승만 정부의 주장을 너무나도 완고하게 무시하는 코델 헐 전(前) 국무장관이 가장 좋아한 ‘크로케’ 게임이었다[잔디 구장 위에서 나무망치로 나무 공을 치며 하는 구기 종목: 역자주]. 1944년 어느 날 오후, 이승만은 카이로회담 컨퍼런스 방송을 들으려고 친구 몇 명과 하던 크로켓 게임을 중단했다. 그는 “한국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약조하는 대목의 ‘공동성명’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적절한 때에…”라는 교묘한 말을 들으며 그 약속은 훼손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송이 끝날 때 이승만은 주인에게 말했다. “내가 코델 헐과 크로케를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유감인지….”

미국의 무관심은 이승만의 성격까지 바꾸어 쓴맛과 환멸을 안겨주었다. 세계의 대부분이 자신의 대의에 적대적이라 확신하면서 그는 친구들과 몇몇 조언자로 구성된 작은 동아리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대표는 수년간 한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해온 존 스태거스(John W. Staggers) 변호사였다. 스태거스는 이승만의 수입을 관리했다. 이 수입은 미국에 있는 한인들의 기부금이 대부분이었다. 기부금이 적을 때는 스태거스가 자기 주머니에서 그 모자란 만큼 채워 넣었을 것이라 많은 워싱턴 사람들은 믿었다.

비통함과 보이 스카우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승만에게는 1919년 당시 자신에게 동기를 주었던 평화주의적 이상주의가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고래들이 싸울 때는 새우가 먹힌다”[‘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를 오인: 역자주]는 한국 속담의 쓰디쓴 의미를 절감했다. 그는 미 국무장관을 우회하여 육군성[미 국방부가 조직되기 전의 미 군사기구: 역자주]을 설득해 자신을 단지 “개인 자격으로서” 해방된 한국에 돌려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군 점령군을 지휘한 존 하지 장군(General John Hodge)은 이승만에게서 남한의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불러들일 수 있는 구심점, 곧 사람을 결집할 수 있는 자질을 보았다. 하지 장군이 서울의 한 연단으로 이승만을 인도했을 때는 5만 명의 한국인들이 그들의 전설적인 지도자가 보는 앞에서 눈물과 환호를 터뜨렸다.

다음 몇 개월 동안 이승만은 하지 장군이 협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이승만이 귀국 당시에는 205개의 한국 정당들이 미 군부에 등록되었다. 그중에는 ‘무의탁 희망 사회’(the Forlorn Hope Society), ‘대한민국 정치적 행동 지지자 연맹‘(the Supporters’ Union for All Korean Political Actors), ‘임시 정부 복귀 준비위원회’(the Getting Ready Committee for the Return of the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 ‘대한민국 민족 청년운동’(the Korean National Youth Movement)과 같은 단체들이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보이 스카우트들”(the New Boy Scouts)이라 불렸는데, 이들 새 보이 스카우트들은 이내 곧 규제 및 법률로 억제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 한국인은 정당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비록 국내 정당이 자신의 지침을 따르고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더라도 어느 그룹과의 제휴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 한국은 러시아와 미국의 간섭이 없는 독립국이어야 한다. 2) 한국은 통일되어야 한다. 즉 북한 공산주의자를 쫓아내고 전국이 이승만과 연합해야 한다. 이승만의 이 실제적인 완고한 입장은 남한 사람을 두 ‘정당’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하지 장군 및 미 국무부와 함께 이승만에 동의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는 자들.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이내 분명해졌다. 이승만의 이 같은 합의로 미국과 유엔은 북한이 총선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자유 선거의 결과를 두려워한 그들은 38선을 통행할 수 없는 국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분할된 양쪽 모두를 경제적으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1948년에 남한은 마침내 북측을 제외하고 유엔 주최로 공정하고 세심한 감독하에서 선거를 실시했다. (남북한의 상대적 인구를 근거로 하여, 국회의원 310석 중 100석을 비워두고 한국을 통일해야 한다면 북한 대표가 충원하도록 결정했다.) 선거에서 한국인은 이승만을 지지했다. 대한민국이 설립되었고 이승만이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장작더미와 전쟁

거의 그와 동시에 이 새로운 대통령은 곤경에 처했다. 공산주의자들은 35년간의 망명 생활이 이승만을 외국인으로 만들었다는 불평을 확산시켰다. 그의 적대자 중 일부는 그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공공장소에서만 한국 옷을 입고 집에서는 서양 옷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공략했다. 공보실의 청중들은 한국말에 서투르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오스트리아인 부인의 존재에 짜증을 느꼈다. 한 좌익은 이르기를 “그가 우리나라의 아버지일지는 몰라도, 그녀는 결코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국회와의 문제였다. 이승만 정부의 사업에 필요한 기금승인을 국회가 거부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제80차 미 국회에서의 트루먼 횡포를 능가하는 원기로써 그들을 비난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은 위헌적인 행정명령으로 기금을 충당했다. “한 대통령과 그의 국민과의 사이에 왜 뭔가(국회)가 끼어들어 있어야 하는가?” 그는 큰 소리로 항변하곤 했다. 때때로 저항적인 국회의원들과 가진 회의에서 분노가 치밀면 이승만은 대통령 저택의 장작더미로 탈출을 한다. 장작을 크기에 맞게끔 두들겨 패서 다듬고 난 후에야 일시적이나마 평정을 되찾으면 이승만은 회의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부 관측통은 북한의 침략 몇 개월 전부터 이승만 정부의 위신이 추락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국회의 상당수가 이승만에게 적대적인 무소속 의원들로 채워졌다는, 지난 5월 유엔 총회에서 관측한 선거 결과를 인용했다. 이승만의 정적들은 국내외에서 이승만을 레임덕 대통령이라 불렀고 정부가 신용을 잃었다고 선언했다. 다른 소식통은 이승만 정부가 지난 6월에서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으며 아시아에서의 그런 대중적인 반공 정부의 효과적인 모범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한 것이라 믿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의 시련 하에서 놀라운 힘을 보였다. 이승만 내각의 상당수가 고위직 관료 재능을 보였는데, 그중 뛰어난 사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상선에서 선장 경험을 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다. 그는 전쟁 초기의 처절한 패배 직후, 대한민국 육군의 신속한 조직 개편을 주도했다. 또 다른 뛰어난 인물도 ‘신’씨 성이었다. 웅변에 능한 국회의원 신익희이다. 비록 이승만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내각과 긴밀히 협력하여 국회를 전시(戰時) 자산으로 삼았다.

남한 국민과 지도자들의 이 같은 전시 대응은 이승만의 정책에 호의적으로 반영되었다. 소수의 이탈 사태를 겪은 대한민국 육군은 아시아의 반공산주의 군대에서 가장 결정적이고도 효과적인 군대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각종 우려와 달리 한국에서는 진정한 게릴라 활동이 거의 없었다. 북한의 비정규 군대에 의한 무수한 공격이 있었지만, 한국의 농민이나 유엔군을 공격하는 노동자의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승만에게 북한의 침공은 자신을 입증할 기회였다. 많은 적을 만들었던 이승만의 비타협적인 반공주의 노선이 전쟁으로 인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한국을 통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에서 이기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할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최근 이승만이 한 말이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승만은 55년 동안 “자기 나라의 아버지”라는 직무에 뛰어들었다. 지난주, 늙고, 피곤하고, 괴팍하지만 아직도 확신에 찼고, 여전히 한국 독립의 상징이었던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자리에 가까이 있었다.


  • * “리”(Rhee)의 한국 이름은 Yi Sung-man(이승만)이다. 영어로 옮긴 “리”(Rhee)라는 한자 성씨는 중국어와 한국어로는 “이”(Yi)로, 일본어로는 “리”(Ri)라고 쓰인다. 다른 많은 한국인처럼 이승만은 서양인과의 교류에서 편의상 그의 이름을 서구화했다.
  • *김구는 1899년 일본인 대장의 목을 졸라 죽이면서 한국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일본인 대장의 시신 곁에 김구 자신의 이름과 주소, 살인 사유를 기록한 메모를 남겼다. (그 일본인 대장은 한국 여왕[민비를 여왕으로 오인: 역자주] 살해를 지휘했다.) 당국은 김구를 감옥에 잡아넣었지만 1901년 탈옥하여 불교 승려로 위장했다. 1917년 김구는 투옥의 위협 속에서는 효율적인 암살을 수행할 수 없기에 자신의 작전기지를 상하이에 이전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그는 폭탄 테러를 계획하여 일군 육군 장성을 죽이고, 해군 제독의 신체를 훼손하고 마고루 시게미츠(Mamoru Shigemitsu) 외상의 다리를 날려버린다. 마고루 시게미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주리주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김구는 또 다른 영웅인 안중근이 딸과 결혼해 결속을 다짐으로써 한국 최고의 영웅이 된다(김구의 장남 김민이 안중근의 조카딸 안미성과 결혼한 사실 관계를 잘못 알고 있음 – 역자주). 안중근은 일본 최초로 헌법상 수상이었던 이토(Ito)를 암살한 영웅이다. 한국 테러리스트의 주모자 김구는 1949년 한 젊은 육군 장교에게 암살되었다. 그 젊은 장교의 친척 중 한 명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역자 에필로그

타임지의 원제 Father of His Country? 이다. 물음표는 무슨 의미일까? 국부라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이 물음표는 오늘날 이승만을 국부로 부르기를 거절하는 이들의 조롱과 같은 부호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시기는 6·25 발발 이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비록 8-9월 낙동강 전투와 9·15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둔 성과로 수도 서울에 재입성했지만 한강 철교는 6월 28일에 끊겼다. 75세의 이승만은 왜 홀로 화장실에서 시거를 물었을까.

이제 막 전쟁의 첫 승기를 잡은 1950년을 들여다 본 이 미국인이 보았을 때, 저 물음표의 의미는 국부로서 이승만의 자격에 의문을 표한 것이라기보다는 요원하기만 했던 대한민국의 미래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이승만이 이 전쟁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통일 한국을 수립하기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3년 후에 있을 정전 협정, 그러니까 분단 한국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오늘날 이승만에 대한 국부라는 칭호를 꺼리지만 이는 ‘국부’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도외시하는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의미는 좋은 아버지 또는 나쁜 아버지를 가르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첫 사람/ 유일한 한 사람을 표지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싫든 좋든 자신에게는 첫 사람 유일한 한 사람이듯이, 국가의 ‘국부’도 그런 의미를 따른다. 현 정부가 건국일 논란을 고의로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국부 이승만의 서거일인 오늘 우리는 사무엘하 7장 다윗의 언약과 함께 읽었다. 아브라함을 우리나라의 단군이라고 치면, 야곱은 이름을 받은 유일한 시조이며 모세는 입법자로서 유일한 그 한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 명실상부 처음 왕인 다윗이 비로소 국부(國父) 격에 해당할까? 그러나 그의 언약에 따르면 아버지 자리는 하나님에게로 돌리고 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ㅡ 삼하 7:14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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