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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이름으로 자행된 총신대 사태, 사랑의 교회를 향한 집요한 공격, 동성애 합법화를 위해 평등으로 위장하고 들어오는 성(性) 관념들, 이념에 오염된 그릇된 토지 사상. 교회를 향한 이러한 도전들은 믿음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저 확신만큼이나 의심으로 얼룩진 한국 개신교의 자화상을 반영한다. 과연 한국 개신교는 부활의 종교인가? (죽지도 않고 부활하겠단 소리로 들려 묻는 말이다.)

‘희년함께’ 페이스북 캡쳐

하지만 역사적으로 부활이란 본래가 의심 속에서 그 자리를 굳건히 세운 투쟁의 산물이지, 어떤 일회적 마술쇼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성서의 증언들은 우리에게 그나마 위안을 준다.

그런 점에서 카라바지오(Caravaggio)의 다음 작품 《도마의 의심》은 결정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다.

카라바지오의 ‘성 도마의 의심’ (1601-2) 포츠담 박물관

이 장면은 필경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는 장면이지만, 실제 본문과는 틀리기 때문이다. 무엇이 틀렸을까.

본문에서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Φέρε τὸν δάκτυλόν σου ὧδε καὶ ἴδε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καὶ φέρε τὴν χεῖρά σου καὶ βάλε εἰς τὴν πλευράν μου,

즉, 옆구리에 넣은 건 손가락(δάκτυλόν)이 아닌 ‘손’(χεῖράς)이었다.

이는 카라바지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장면에 관한 중세 모든 도상의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도상이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있다.

프랑키스(Frankish Psalter)의 삽화, 1279.

 

두치오(Duccio)의 ‘안심하는 도마’ (1308)

 

헨드릭 테르브루그헨(Hendrick ter Brugghen), 1622.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는 것’과 ‘손을 내밀어 넣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카라바지오의 도상은 가장 강렬하게 도마의 케이라스(χεῖράς/ 손) 표지 기호를 소실시키고 있다.

그 표지를 잘 이해하려면 이른바 롱기누스(Longinus)에 관한 전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 상에서 도마의 (의심의) 기호는 앞쪽에서 등장하는 이 로마 군인의 기호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롱기누스는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으로 확인 사살한 로마 병사의 이름이다. 그는 그 사건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한다. 눈 질환을 앓던 그는 예수님 옆구리를 찌를 때 사용한 자신의 창끝에 묻은 피가 안구에 닿으면서 시력을 되찾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훗날에는 갑바도기아 지역의 수도자가 되어 선교 활동을 하다 참수당해 죽은 것으로 전한다. 가톨릭에서는 “성 론지노”라는 성인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성서에 나오는 이름은 아니지만 중세교회 전승 속에서, 특히 ‘빌라도 행전’ 또는 ‘니고데모 복음서’라 불리는 위서에서 언급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롱기누스

그러나 롱기누스라는 이름은 사람이 아닌 ‘창’을 뜻하는 롱케(λόγχη)에서 유래하고 의인화된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제롬의 라틴어 성경 벌게이트에서 lancea로 번역된 이 창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다섯 상처’ 중 하나로 소개되면서 중세의 성물 숭배와 함께 발전된 것이다.

롱기누스의 창 끝 (가상물)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저 ‘창’이 롱케(λόγχη)이다.

바로 이 롱케라는 명사가 도마의 ‘손’과 강력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다섯 성흔’(Five Holy Wounds)이 누가복음에서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고 소개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내 손과 옆구리”

―로 다르게 표현된 이유로서, 통상 히브리어의 손(야드/ יָד)이나 헬라어의 손(케이라스/ χεῖράς)은 팔뚝을 포함하는데 여기서 도마가 “손을 내미는” 도상은 바로 롱기누스가 창을 내밀어 찌르는 행동과 그 기호를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롱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나 살았나ㅡ’

긴 창끝으로 찔러 보았다.

도마는 그리스도께서

‘살았나 죽었나ㅡ’

(손가락이 아닌) 긴 팔 끝의 손으로 찔러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심’의 표지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참고로 《다빈치 코드》(2003)의 소재가 되었던 ‘최후의 만찬’에서 댄 브라운은 익명의 손(?표시)이라는 허구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었는데, 본래 이 도상에서의 핵심은 모든 인물의 손 모양을 통해 각 사람의 태도를 기호화하고자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도(企圖)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케이라스(χεῖράς/ 손) 기호와 평행한다. 가령 베드로(왼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의 왼손은 그 문제의 익명의 손과 더불어(어울리게) 가장 날카로운 비수의 기호를 띠고 있다. 이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버금가는 베드로의 실패(3회 부인)를 반영한다.

베드로의 손 모양(빨간 화살표)과 비수를 쥔 ‘익명의 손’은 세트이다. 반(反) 베드로(anti-Petrine) 정서를 손으로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도마에게 케이라스(χεῖράς/ 손)를 “내밀어 보라” 했을 때, φέρω(페로)라는 어휘를 쓰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Φέρε τὸν δάκτυλόν σου ὧδε καὶ ἴδε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καὶ φέρε τὴν χεῖρά σου καὶ βάλε εἰς τὴν πλευράν μου,

‘창’을 뜻하는 롱케(λόχη)라는 말 자체가 ‘길게 닿는다’는 뜻의 헬라어 ‘라이카노’(λαγ-χάνω)에서 유래하였으며, ‘롱코포로스’(λογχο-φόρος)라고 하면 “창의 전달자”(내밀다)를 뜻한다는 점에서 손가락이 아닌 이들 비수 또는 케이라스(창끝)가 진정한 ‘의심’의 표지이다.

부활과 관련된 이 ‘의심’의 표지가 오늘날 우리가 교회 내에서 자행하는 그 모든 ‘의심’의 태도를 표지하는 기호인 셈이다.

실제로 우리 개개인은 대개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할 때면, 그리스도의 신체를 ‘긴 것’으로 찔러보듯 한다.

‘살았나 죽었나’

그렇게 ‘살았나 죽었나ㅡ’하는 물음은 롱기누스의

‘죽었나 살았나ㅡ’와 일반인 것이다.

따라서, 도마의 의심에 대한 도상은 저 카라바지오의 도상이 아닌,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의 프레스코에서 묘사된 롱기누스의 도상이 더 근접하다 할 것이다.

안젤리코(Fra Angelico)의 프레스코.

한국 개신교는 예수님의 몸 곧 교회를 저렇게 당분간 찌르고 있다. 아마 개혁을 해야 한다는 모양이다.

(cf. 요 20:19-31; 요일 1:1~2:2.)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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