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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성서일과(lectionary)를 받아들고는 내가 혐오하던 이씨(氏) 아저씨를 떠올렸다.

바울이 제사에 쓰는 술처럼 (혹은 피) 주님을 위해 자신을 “붓는다”고 표현했던 말년의 고백, 베드로가 말세에는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영을 부어 주신다며 인용했던 요엘의 예언, 그리고 옆에 서있던 바리새인과는 달리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 쥐어뜯던 세리 이야기(딤후 4:6-8, 16-18; 욜 2:23-32; 시 65; 눅 18:9-14.),
이들을 읽으며 그 아저씨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1)

유년시절 자영업 하던 아버지 탓에 많은 어른을 보며 자랐지만,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저씨였다. 귀엽다면서 내 얼굴 가까이 내미는 그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술 냄새 풍기지 않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독한 냄새, 어린 내가 보기엔 아무 할 일 없이 술 냄새만 풍기며 드나드는 것 같은데도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나무랄 뿐 아버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장 통을 지나오는 길목의 주점에 낯익은 모습이 보여 힐끗 보니 이씨 아저씨가 혼자 앉아 있었다. 함께 마주 앉은 사람도 없고 안주도 없었다. 안주도 없이 소주만 마시는 게 어린 내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 잠깐 서서보고 있노라니 아저씨는 술이 아직 남은 소주병을 술집 아주머니에게 맡겨 놓는 것이었다. 오가며 딱 두 잔씩만 마신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으며 알콜 중독자는 폭음보다는 소량의 알코올을 항상 마신다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렇게 술만 마시다보니 젊은이들은 그를 무시했다. 아버지의 일꾼 중 어떤 형은 그 아저씨와 무슨 다툼이 있었는지 순간 그를 번쩍 들어서는 대형 쓰레기통에 처박으려고까지 하는 걸 보았다.

가정도 건사될 리 없었다. 아내가 도망갔기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된 것인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아내가 도망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씨 아저씨는 그렇게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회사 여러 사람들이 그 아저씨 집에 초대되어 가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보기엔 기이했다.) 언제나 혼자였던 그 아저씨 곁에 아주머니 한 분도 계셨다. 떠났던 아주머니가 돌아온 것일까 새 아내를 맞은 것일까 (아마 전자가 맞을 것이다) 식사 후 반주와 함께 여흥이 돋자 아저씨는 갑자기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백구야~~배~액구야~아~~ 백구야”

‘백구야’가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이씨 아저씨 모습은 전에도 보지 못했고 후에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대포집에 홀로 앉아 한두 잔씩 홀짝홀짝 마시는 게 보였다. 술을 끊지 못해서 아주머니가 떠났는지, 아주머니가 떠나서 술을 마시는 것인지 이번에도 알 수 없었지만 이씨 아저씨는 그렇게 죽어갔다. 한 2년쯤 뒤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2)

이렇게 사람 망치는 술이 없었던 적은 없다. 금주를 법으로 제정한 군주들이 있기는 했지만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영조가 가장 세게 그 법을 강제했을 것이고, 미국은 1900년대 초에 강하게 시행했던 것으로 아는데 모두 다 밀주 만드는 사람만 배불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예가 알 카포네다.

뿐만 아니라 술은 성서의 오랜 제사법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신약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성만찬은 술의 예전 아니었던가.)

오순절 강림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중 일부는 성령 받은 이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는데, 베드로는 취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 주신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행 2:17-18).

그리고 무엇보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술처럼 “(벌써) 부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지닌 메타포는 공교롭게도 술이다. 새 술이 맞다. 사람의 혈액에 술의 기운이 닿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자녀와 젊은이는 늙은이의 꿈을 통해 양육 받는다. 젊은이가 늙은이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 영을 받은 모두의 생애가 완전히 그 영이 꾀하는 일에 “부어진다”라는 점에서 성령은 언제나 소명과 결부되어 성서에 나타난다.

(3)

나는 설교를 위해 그 소명의 삶들을 예시로 준비하였다. 자기가 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물처럼 피처럼 남김없이 부은 사람들의 예시.

IT시대의 중독자는 3박4일 게임만 하다가 죽기까지 하지만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은 자기 삶을 그야말로 “부은” 자의 좋은 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문의 주인공 바울. 두 말할 나위 없이 “부어진” 최상의 예다.

그러나 설교에 직면한 순간에 성서일과 중 가장 끝자락 누가복음 말씀이 나를 짓눌렀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바리새인 옆에 있던 세리는 하늘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만 쳤다고 했다. 바리새인은 하늘을 상대적으로 “감히” 올려다보는 모든 자를 말한다. “감히”가 무엇을 말하는가.

내 삶은 언제나 바울인 것처럼, 언제나 스티브 잡스인 것처럼 회자하며 기도하고 설교하는 나, 전혀 저런 알콜 중독자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노라고 자신하는 나는 바로 그 ‘감히’ 하늘을 향해 고개 드는 자, 즉 고개 빳빳이 든 그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누구도 이씨 아저씨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 본인조차도.

성경은 너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교훈하기도 하지만, 그 깊은 기저에는 너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말하는 그 교훈을 파괴>한다.

(4)

언제나 장례가 빈번할 수밖에 없는 교회들. 교회에서 신앙 없는 이들에 대한 장례가 맡겨졌을 때 다소 난감해하는 표현 역력한 것은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명백하게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정된 사자(死者)에 대해서는 드러내 표현은 않지만 매우 편파적 장례식이 치러진다. 아예 ‘천국환송식’이라는 활자로 인쇄하기도 한다. 그러면 불신자의 장례는 “지옥환송식”인가?

나는 언제나 공교롭게도 장례식 기도에서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기도 논조를 유지해왔다. 더하지도 감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삶에 사력을 다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의무를 모두 이행했던-”

이 기도 논조는 알코올 중독자 이씨 아저씨의 사망 앞에서도 읽혀야 했던 문장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치열한 삶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까지 하려는 경향에 휘말린다.

(5)

결국 나는 설교 말미에 “이씨 아저씨처럼 되지 말자”가 아니라 “이씨 아저씨처럼 되지 말자고 했던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자”로 끝맺고 말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부은 삶,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를 부은 그 역사가 바로 이 노선에 베이스를 깔고 있다는 급하고 강한 이끄심 때문이었다.

가끔 우리는 그들을 오늘날의 세계적인 목사나 부흥사의 형상으로 착시를 일으킬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한 그들은 세상이 보기에 이씨(氏) 아저씨의 형상이었을 것 같다. 스스로를 만물의 찌꺼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말로 하면 그 가시적 교훈에 대한 파괴가 새 술의 본질적인 기운이었던 것이다.
나도 새 술에 취했는 지는 알 수 없도다-

* 2013.10.27일자. 본문, 딤후 4:6-8, 16-18. (cf. 욜 2:23-32; 시 65; 눅 18:9-14.)

이미지 참조: https://cartoonimages.osu.edu/index.cfm?fuseaction=collections.seeItemInCollection&CollectionID;=02d5386b-a575-4bfa-8005-cf676fd41345&ItemID;=694fd8b8-3210-4dc0-8e03-aa0c256643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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