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언어권에서 사용된 ‘죄’라는 말에 대한 쓰임새가 있다. 이걸 안다고 죄를 덜 짓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에 담긴 죄의 흔적을 통해서 죄에 대한 심리와 공동체의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볼 수는 있다. 위반 죄 아삼(אָשָׁם), 불의 죄 에베르(עֶוֶל), 악한 죄 라(רַע), 반역 죄 파솨(פָשַׁע), 벗어난 죄 하타(חָטָא) 순으로 여섯 개만 요약하겠다. 헬라어 권역에서의 죄 개념은 다음에 정리하기로 한다.
아삼(אָשָׁם) ─ 위반 죄
죄 중에 위반 죄 아닌 죄가 없지만 특별히 그 위반 행위의 개념이 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어휘는 성결 법전인 레위기나 민수기 그리고 에스겔서 중에서도 성전/제사 예전에 의미 있게 분포된 죄 용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존전에서의 죄책에 민감한 죄 개념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지은 죄나 의도적으로 짓지 않은 죄 구분과는 별개의 ‘죄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삭의 아내를 범하려던 아비멜렉이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고 말한다. 이때 발생한 죄는 의도인가 의도가 아닌가. 둘 다 아니다. 이런 죄 개념이 속건제, 속죄제를 지향할 때 주로 사용된 것이다.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하는 식의 오늘날 죄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속건/속죄제는 명백한 의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에베르(עֶוֶל) ─ 정당하지 못한 죄
신명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무릇 이같이 하는 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25:16) 여기서 지목하는 죄인이 지은 죄는 저울을 속여 먹은 죄를 가리킨다(17). 사기 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욥기에 다량으로 분포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판관에게 판정을 촉구하는 기제에서 나타나는 죄 개념일 수 있다. 궁극적 판관은 물론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도 유의해서 보면,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삼하 7:10), 하나님이 다윗과 성전 계약을 맺는 장면인데 여기서 ‘악한 유’로 번역된 아블라(עַוְלָה֙)가 정당하지 못한 죄의 종족들이다. 주로 다윗의 대적 내지는 침략자를 일컫는 말로서 이 본문의 맥락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주권자(심판관)로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신명기와 지향성이 같다.
라(רַע) ─ 파멸의 죄, 폐허로 만드는 죄
이 죄는 헬라어 포네로스(πονηρός) 내지는 카코스(κακός)로 주로 번역되는 용어이다. 헬라어에서의 죄 개념은 따로 설명을 드리겠지만, 헬라어로 된 죄들 중에서도 죄질이 안 좋은 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죄가 토라에서는 파멸과 폐허의 원인이 되는 죄로 주로 쓰인다. 다름 아닌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알게 된’ 악(惡)이 바로 라(רַע)였다. 그런데 여기서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알게 되었다는 것인가. 같은 말이다. 한마디로 ‘아는’ 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것이 개인 자신 또는 공동체를 파멸/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파솨(פָשַׁע) ─ 반역 죄
파솨를 간혹 ‘허물’로 옮길 때가 있지만 그 죄는 본질상 반역이다. 솔로몬이 백성을 대표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왕상 8:50) 여기서 언급되는 죄들이 파솨이다. 마치 허물(모르고 지은 죄)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자기네 집안(다윗 왕가)을 배반했다며 규탄하는 대목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12:19) 이것이 파솨이다.
아원(עָוֹן) ─ 저주 받을 죄
이 죄는 어떤 의미에서는 히브리인의 세계관과 습속을 가장 잘 반영하는 죄 개념일 수 있다. 저주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말하기를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호소하는 대목에서 이 죄성에 대한 포문을 열고 있으며, “그것(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는 대목에서도 이 아원이라는 죄를 언급한다. 이는 부정함(inquity)인 동시에 죄책(guilt)이며 또한 그것은 저주와 맞닿아 있다.
하타(חָטָא) ─ 벗어난 죄
언뜻 이 죄는 아삼 죄와 비슷하다. ‘위반하는’ 행위와 ‘벗어나는’ 행위가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반하는’ 행위는 안으로 들어가는 관성을 띤다. 즉 침범하는 행위이다. 반면 ‘벗어나는’ 행위는 밖으로 나가는 관성을 띤다. 따라서 아삼의 경우는 손과 발에 묻는 오물이었다면 하타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뭔가를 묻히는 행위라기보다는 벌거벗은 ‘상태’를 표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때는 (아직 내 안에서) 죄가 구성되지 않지만, 알았을 때는 강력한 죄를 구성한다. 그렇지만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참고로 다윗은 일생일대의 죄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그 죄에 하타라는 죄명을 붙이고 있다. 시편 51편의 회개에 등장하는 죄 개념이 바로 하타이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을 사지로 몰아 넣고 죽인 악질적인 죄를 저지르고도 우리가 앞에서 다룬 모든 악한 죄명이 아닌 단지 ‘과실’을 뜻하는 하타로 경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죄 하타는 엄밀한 의미에서 밧세바 간음 죄, 우리야 살인 죄를 지목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죄들을 짓는 순간에 ‘몰랐던 상태’에 대한 회개의 요청이란 사실이다. 지구상의 모든 죄는 아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행위이지만, 그 죄로부터 빠져나올 때는 오로지 모르는 상태 즉 벌거벗었던 사실을 ‘아는 행위’를 통해서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상 모든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죄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아는’ 순간에 ‘몰랐던’ 상태가 구성되는 선험의 구조 때문이다. 이것이 하타이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회개 행위(죄를 벗는 행위)의 전형이기 때문에 토라에서 하타는 522회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