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기원─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풍경 속 여러 요소 중에 가장 실제와 똑같지 않은 형상을 지닌 것은 구름일 것입니다. 형상이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고,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런 구름에 관한 사유의 글입니다. 구름처럼 그 형체를 붙잡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구름의 기원
공주의 어느 산자락 위에서… 2014.7.30.

위의 사진은 충남 공주 어딘가를 지나다 찍은 장면입니다. 직접 본 풍광과 똑같은 느낌을 줘보려고 했지만 사실 그 자체가 여러 단계의 왜곡에 지나지 않죠. 찍힌 모습도 왜곡이요, 그것을 원래와 똑같은 모습으로 인화하겠다는 자체도 왜곡 행위에 불과합니다.

고대인(고대인이라고 해봐야 언제나 한정적입니다. 문헌 정보를 통해서나 알 수 있는데 그 작품의 저자가 대부분 히브리인 또는 헬라인)은 구름을 그나마 물의 순환적 의미로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오래 된 문헌 정보가 일리아드(Ἰλιάς)입니다. BC 6세기 경 문헌이고 내용은 그보다 400-500년 전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을 것입니다. 신들의 영산인 올림푸스 분위기를 구름 속으로 묘사합니다. 그런가 하면 플라톤의 <잔치>에서 나왔던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는 <구름>이란 문헌에서 “하늘에 구름이 없을 때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Νεφέλαι 370-3). 그러고는 “오!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제우스가 소변을 보는 것일까요?”라고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물을 뜻하는 마임(מים) 역시 소변이나 각종 인체에서 내는 수분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구름은 흐릴 ‘굴’에 구름 피어오를 ‘엄’(渰)을 붙인 말이라는 주장도 있고, 냇가를 뜻하는 ‘갈’처럼 물로서의 ‘굴’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역시 물/습윤에서 그 원리를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구름은 아난(ענן)이라 합니다. ‘나타나게 만들다’, ‘때를 알다’, ‘점을 행하다’… 따위의 뜻과 통하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넵펠레(νεφέλη)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밀집한 다수의 군중을 뜻하는 말 네포스(νεφος)에서 왔고, 네포스는 암흑을 뜻하는 그노포스(γνόφος)와 이어져 있습니다. 이 어휘들의 의미 자체가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구름의 장면 분위기와 일치합니다.

신구약 성서를 합해 약 154회 정도 나오는 구름은 언제나 뭔가(그 ‘뭔가’는 대부분 하나님)의 현현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구름이란 속성 자체가 ‘있지만 없는’ 것이고 ‘없지만 있는’ 까닭일까요(중요).

‘있지만 없는’ 것이고 ‘없지만 있는’ 이 현상은 고대인에게 물과 불이 합하여 만들어내는 제1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고대인은 원소를 네 개(혹은 다섯 개)로 이해했다죠. 그들에게 있어 이들 네 개의 원소 중 양 극단인 물과 불이 만들어내는 이 현상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일한 ‘형상’ 행위였기에 바로 이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했을 것입니다. 오랜 저의 생각입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주거 개념이 나왔다는 사실은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지닌 핵심 주제입니다. 오래된 생각은 교정되거나 수정되기 마련인데 지금도 달라진 게 없는 제 생각을 여기에 옮겨 보면…

구름은 아주 작은 알갱이로 된 물방울 또는 얼음들의 군집이 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다. 이 작은 알갱이의 반지름은 학술적으로 약 0.02~0.05mm 정도라고 한다. 이른바 구름으로서 관측되려면 수십 억 개의 작은 알갱이가 모여 있어야 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구름이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은 빛의 반사율이 좋게 응집돼 있기 때문이며 이 반사율이 좋을 때는 90% 이상도 상승한다고. 아래쪽일수록 회색을 띠며 각종 색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물방울이 빛을 산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과학의 서술이다. 이런 구름이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게 묘사된다. 구름이 비를 몰고 온다는 이성적(과학적) 사고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왕상 18:44). 그렇지만 그 구름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현현하신다고 생각했다. 빽빽한 구름(a dense cloud; a thick cloud)에서 나타나시면 들리기만 했다고 서술한다(출 19:9). 이렇게 하나님이 잠깐씩 나타나신다는 이해가 거주(dwell)의 개념으로 발전해 쉐카이나(Shekinah)라는 어휘로 정형화되고 심화된 것은 성경의 작성 시기가 아니라 정경 확정 시기로 잡는 견해도 있다. 주거가 실제적인 경험이 구름을 그런 방식으로 보았다. 이런 관념적(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관념) 토대에서 발전한 성소 신앙은 성막과 성전을 거쳐 결국 예수께서 궁극적인 쉐카이나가 되셨다(마 1:23).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이 공간 개념의 변화로 쉐카이나는 “없는 곳이 없다”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 물 입자들이 없는 곳이 없다면 우린 이미 구름에 둘러 쌓여있는 게 아니겠나. 빽빽하게 응집됐나 흩어졌나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2008-04-05)

헬라인의 경우 그리스 시대에서 로마 시대로 이행하면서도 동물의 배를 가르고 내장(內臟)이 만들어내는 신점 치는 행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동물 체내의 내장이 그려내는 ‘있지만 없는, 없지만 있는’ 우연적 도상을 붙잡으려 천착한 것입니다. 일종의 형상 행위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의 경우는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면에서는 헬라인뿐 아니라 여느 고대인과 같았지만 그 내장의 도상을 취하는 대신에 구름이 그려내는 비구상 도상을 천착했다는 점에서는 이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형상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붙잡고 만질 수 있는 도상을 동물의 내장에서 심취했던 헬라인과는 달리 ‘붙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도상 그 자체를 신뢰했다는 점에서 보다 우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임재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다분히 형이상학적이지만 사실은 과학적인 유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빛의 산란과 구름의 입자 크기를 밝혀내는 현대 과학도 그 도상의 원리는 밝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름(넵펠레)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더라”는 예수 승천의 문장을 굳이 “수많은 군중(넵펠레) 뒤로 사라졌다”는 말로 바꾸려는 현대 신학자의 과학이 동물 내장이나 살피던 고대인의 과학보다 결코 우월하지 못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구름이 갖는 이런 속성은 주거가 없었던 광야의 유랑 생활에서 심화되었을 것인데 이는 바벨론의 포로기를 살아가는 유대인의 처지 속에서 적극 차용되었을 것입니다. 구름은 고난을 둘러싼 안개이면서 작은 입자로 퍼져 있는 습윤입니다. 욥기에서도 모든 고난의 정리 단계로 접어든 37장부터 바로 이 구름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빽빽하게.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 상에 이루려 함이라

욥 37:10-12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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