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부분의 칭의 논쟁에 있어 일체 간과되어 버린 전제 요소들(이를테면 히브리서 Πίστις의 배경)을 요약한 글이다.

우선 다음 표로 구성된 개요를 자세히 관찰하고, 부연 설명을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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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교가 원래는 은혜의 종교였다는 사실은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구약에 관한 개론이 들어선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구약에 관한 개론이 없는 학자가 주로 이 논쟁을 문법/교리 논쟁으로 끌고 들어간다). 유대인 자신은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구원의 의미는 다를 지언정) [* 다음 글 참조: 칭의의 기원]

2) 바울은 이 기본 틀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골격을 이루어냈다. 이 때 ‘Πίστις Χριστοῦ’는 이 시대의 학자들이 ‘in’이냐 ‘of’냐를 도단 할 만큼 그렇게 예민한 (현대식) 문법 문장이 아니다. 사실 in/of 문제는 고대의 문법 문제라기보다는 현대식 재구성 문법을 고대 언어에 투사한 결과에서 생긴 분란에 가깝다. in의 번역은 통상적인 것이며, of의 번역은 보다 충성스런 ‘칭의’의 전치사인 것은 맞다.

3) 그리고 칭의 논쟁에서 빼놓지 말고 견지해야 하는 것이 카톨릭에서의 칭의다. 카톨릭 신학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 이루신 결과를 표현하기 위해 들여온 이 용어를(δικαίωσις, 동사 δικαιόω /의롭다고 하다/칭의)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올바르게 만든다’(to justify)고 보았다. 이 같은 이해는 사실 건강한 개념으로 텍스트 본래의 의미에 가깝지만 교회사적으로 이들은 두 가지 문제를 저질렀다. 첫째, 성찬 떡이 실.제.로. 예수님 살로 변한다고 여긴 것처럼, 인간의 義도 실.제.로. 변한다고 본 것이다(마술). 특히 성직자로의 변화는 더 특수한 것으로 간주하여 성직매매를 자연스럽게 하였다. 둘째는, 이 변.한. 신분들은 자연스런 선행(good works)으로 이어져야만 했으나, 그렇게 하는 대신 성물(세례 요한의 해골 따위) 같은 걸 돈 주고 사야 성립하는 ‘선행’에 천착했다. 주로 건축헌금 땜에.

4) 여기서 루터의 칭의가 등장하게 되는데, 루터의 텍스트를 현대 신학자는 위 1)항 또는 2)항에다가 맞바로 꽂아 주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루터의 텍스트를 주석하는 바른 처사가 아니다. 현대 신약 학자는 대개 Sola 문제를 들어서 (‘원문에 Sola가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루터의 ‘Πίστις Χριστοῦ’가 in Christ됨에 대해 성토하지만, 루터 자신이 종래의 유서 깊은 번역에 of Christ로 되어 있는 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에게는 그 번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음 6)항에서 예시할 히브리서 저자들이 자유자재로 시편 인용을 석의해 히브리서 판본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5) 샌더스(E. P. Sanders)라는 학자가 쎈세이션을 일으킨 요인는 두 가지일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착시를 일으키는) 학명 하나와 ‘행위 없는 믿음’ 즉, 현대 교회 공동체들이 워낙 행위 없는 믿음을 구가하다보니 이 주제의 약빨이 여전한 일면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그의 새 관점을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새 관점’이 되게 만들었다. 알고 보면 헌 관점 중에서도 헌 관점. 

6) 이 논쟁의 참여자 대개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만을 가지고서 이 주제를 다투게 마련이다. 1차서신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와 같은 서신은 그 외(Others)의 서신류라는 터부가 있어 그런지 이 주제에서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1, 2차 서신과 Others로서 경계도 중요하지만 통전적인 공동체 이해에서 오는 전통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개신교 신학자는 많이 간과 한다. 성서(Text)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카톨릭 신학은 오히려 이런 통전적 이해에 탁효를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따라서 다음 히브리서의 구절을 우선 유념해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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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6:1-8

여기서 ‘한 번 빛(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누군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에 대한 흔한 설교 때문에 이 타락자들이 마치 ‘술 마시고 담배피고 나이트클럽 출입하는 집사/장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서 타락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린 자들’(1절)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으려는 자들’(2절)이다.
이들은 ‘완전한 데로’(2절) 나아가다가 중단한 자들이다. 믿음의 궤적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이들은 ‘떨어져나간 자들’(fallen away)이다(6절).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가 없다.
왜? 나이트클럽으로 돌아가 버려서가 아니라(혹은 제우스에게 돌아가버려서가 아니라)
율법으로 돌아가 버린 자들이다. 이방인이 아니다.
여기서 율법이라 함은 (복음서의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샌더스가 말한 ‘언약적 율법주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만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단순히 죄를 짓고 다시 돌아오는 자는 그리스도의 효력으로 죄사함이 되지만,
그리스도가 없이도 ‘언약’을 누리는 자들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에 참여한 바’(4절)가 짓는 경계인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covenental nomism)라는 말은 ‘율법’(legal)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현대 미국인이 고안해낸 용어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 용어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계약’(ברית)이라는 거시적인 개념 속에서 구약 텍스트 전반에 이미 내포되어 있으며, 바로 그들은 히브리서 공동체가 끊임 없이 견제하고 있는 전통 공동체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술어를 통해서 ‘고토신학’ 등과 연합하여 ‘옛것은 좋은 것이여ㅡ’(身土不二)는 매우 구시대적인 착상이 아닐 수 없다.
‘유보적 칭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끝으로, 그렇다면 루터는 왜 ‘오직’이라는 말을 들여왔느냐ㅡ?

그것은 아마도 예컨대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의 문맥을 자신의 처한 상황에 맞게 주석형 인용을 해 들여오는 것처럼 자신의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담력의 역본이라고 보면 맞다(루터가 성서 저자는 아니지만 종교개혁은 그 정도로 중차대한 획.).
In/of Christ문제도 이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루터는 이 단어(‘오직’)가 헬라어 성경 로마서에는 없다고 항의한 ‘얼간이들’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고 한다.

“이 번역이 분명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Luther’s Works 35. 188)

* 참조: 히브리서 10:5-10에 나타난 시편 40:6- 인용 폭 (오늘 주일 성서 일과라서 이걸로 샘플링)

히브리서 10:5-의 본문에 삽입된 이 인용은 시편 40:6-이하를 인용해온 것이다. LXX를 참조하면서도 매우 주관적인 번역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10:5-의 본문에 삽입된 이 인용은 시편 40:6-이하를 인용해온 것이다. LXX를 참조하면서도 매우 주관적인 번역을 하고 있다. 물론, 루터가 성경 저자인 것은 아니지만.

에필로그.

결국 위 칭의 단계 표로 보건대,
5)항 즉 ‘새 관점’은 1)항의 ‘헌 관점’을 새것으로 내려들인 것으로, 그러니 루터와 바울의 저술/번역까지 문제 삼을 수밖에…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루터가 유대 율법주의 속에서 (칭의의) 개혁을 시도하는 바울의 모습 속에서 카톨릭의 칭의에 맞서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5)항도 아니요, 1)항으로 돌아가서도 아니요 2)항과 4)항의 칭의를 흔들림 없이 붙들어야 할 것이다.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 새교회 새목회 (2013).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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