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 문창극 총리후보의 인준 시기였던 2014년 6월 15일에 처음 썼다가 후보 사퇴를 했던 24일에 수정을 가한 글이다.
문창극 장로가 총리 인준을 통과할는지 어떨지 모르지만 6.24일자로 자진사퇴하였다. 그로 야기된 “일본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관은 결과적으로 그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기독교와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로 양자를 가른 듯하다.갈랐다. 이른바 ‘역사 인식’이라고 하는 사회 개념이 구속사를 둘로 가른 것이다. [이전 글 참조: 문창극이 가른 두개의 기독교]
전자는 후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후자는 일본인이 저지른 (식민지인의 목을 치는 등의) 잔혹한 만행 사진까지 보여 가면서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항변하였다.
이런 역사 인식의 차이가 성서에서도 나타났다. 그럼에도 성서는 어떻게 합(合)의 역설의 결과를 끌어냈을까.
가령 다윗의 인구조사로 말미암아 들이닥친 이스라엘의 재앙에 대한 보도는 두 개의 극명한 역사 인식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예이다. ‘하나님의 뜻’의 예시이다(삼하 24:1-25; 대상 21:1-30).
인구를 조사한 것이 대체 왜 재앙의 원인이 되었는지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두 역사가는 공히 재앙의 원인을 자기들의 왕 다윗의 행위에게서 찾았던 것 같다.
이러한 신학적 진단에 의거해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찾아가 죄상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 했다. (1) 기근 (2) 대적에게 쫓김 (3) 전염병이 그것이다.
두 역사가의 관점 차이는 우선 이들 세 재앙의 기간 수에서 차이가 나지만 – 전자는 7.3.3 후자는 3.3.3 – 가장 큰 차이는 이 재앙의 총체적 ‘기획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점에서 대폭 갈렸다. 오늘날의 우리처럼.
한 역사가는 이 모든 악재의 기획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충동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역사가는 그 기획자를 하나님이 아닌 사탄으로 지목한다.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는 바람에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ㅡ 삼하 24: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ㅡ 대상 21:1
이스라엘의 재앙은 하나님의 뜻인가? 악마의 뜻인가?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의 뜻인가? 악마의 뜻인가?
애굽 노예 생활은 하나님의 뜻인가? 악마의 뜻인가?
일제 강점기는 하나님의 뜻인가? 악마의 뜻인가?
일제 강점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문창극의 낙마는(자진사퇴는) 하나님의 뜻인가? 악마의 뜻인가?
사실 그걸 어찌 알겠는가? 우리의 귓속에 속삭이는 충동음이 하나님인지 사탄인지?
알 수 있다구?
역사가들은 저마다의 인식으로 자기 쓸 것을 쓰게 마련이다.
한 역사가의 시각은 다윗의 교활함을 다소 덮고 있다.
재앙에 대한 다윗의 선택에서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다윗의 답변이었다. 세 가지 재앙 중 1번이면 1번이고 2번이면 2번이지,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다윗은 ‘우리’라는 용어로 슬쩍 넘어가고 있다. 사실 1, 2, 3번 중 자기 개인이 고생하는 것은 오로지 2번 재앙뿐이다. 어떤 고생인가?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인생, 아들에게 쫓겨 다니던 인생.., 그의 젊은 나날은 남에게 쫓겨 다니는 일로 세월을 다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고생을 또 하라구?
차마 백성이 직격탄을 맞을 1번이나 3번이라고 직접 고르지는 못하고.., “…손에 빠지고 …손에 빠지지 않기를 구한다”는 이상한 문장, 즉 2번만은 제외시키는 교활한 문장인 것이다.
또 다른 역사가는 여기서 그의 꼼수를 덮지 않고 드러낸다.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구하노라”
앞선 역사가처럼 <우리가>라고 하지 않고 <내가>라고 명시함으로써 다윗의 저속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가와는 달리 앞선 역사가는 심지어 밧세바를 범한 이야기도 아예 누락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역사가는 신랄한 셈이다. (결국엔 다윗의 회개로 마무리 되지만)
하지만 성서는 이런 역사 인식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성서가 주목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예언의 성취’이다.
그래서 다윗의 인구조사에 얽힌 이 이야기의 결말은 바로 그 재앙으로 치던 장소의 유래에 머문다.
그곳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알다시피 훗날 솔로몬 성전의 자리가 된다.
그리고 또 그곳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 드리려고 칼을 치켜들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모리아 산이었을 그 때에는 아브라함이 칼을 치켜들고 있지만, 아라우나 타작마당이 된 지금은 천사가 재앙의 칼을 치켜들고 있다. 이 도상(圖像)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뉘우침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이니까 뉘우치지 않는다구?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가 만류하는 것은 뉘우침이 아니며,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재앙을 내리는 천사의 칼을 만류하는 것은 뉘우침이 아니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노가 강타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강타하고 만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뉘우침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이와 같이 자기의 인식에 따라 그 어떠한 사건과 역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거나 혹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양자는 언제나 그 아버지의 뉘우침(뜻)과 그것을 이루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실천) 속에서만 하나 된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요 6:40)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아우르는 힘이 있으니 그것을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에필로그.
따라서 역사 인식은 다를 수 있으나,
아들의 역사 개입(praxis)과,
아버지의 뉘우침(will)과,
성령의 힘(power), 이 삼위를 통해서 결국에는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룰 수 없다면 우리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바, 그 모든 주권과 섭리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6).
특히 문창극을 제거한 최고 결정권자의 다윗과 같은 꼼수를 우리가 오늘 목격하고 있다.
* 2014.6.15. 성령강림절 후 제 1주차 | 본문, 고후 13:13.
* 글 수정일자: 문창국 총리후보 사퇴일 (6.25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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