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πίστις)과 신뢰(πεποίθησιν)는 본래 뿌리가 같은 어휘다.
그런데 이 ‘믿음’이 ‘신뢰’라는 뿌리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결별하는 과정이 보전된 본문이 있다.
그 과정에는 ‘믿음’이 보다 본질적인 명사로 독립하여 ‘칭의’ 라는 개념에 다다르는 과정이 담겼기에 꽤 중요한 장면일 수 있다.
그 장면은 다음 본문에 담겨 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①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②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③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중략}…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립보서 3:3-14.
본디 ‘믿음’이라는 말은 ‘신뢰’라는 말과 의미가 상통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문명에서도 그러하다. 특히 헬라어에서 둘은 아예 어근을 공유하면서 나타난다. (‘신뢰’로 번역된 낱말의 몸체인 πείθω와 믿음/πίστις의 어근은 πιθ-다.)
이와 같이 뿌리를 같이 하는 어군임에도 바울에 따르면 ‘신뢰’란 ‘믿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단히 부정적인 것이다.
1) 그에게 육체란 ‘신뢰’(πεποιθότες)할만한 게 아니다. /빌립보서 3:3a/
2) (그럼에도)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πεποίθησιν)할만한 걸로 오인할 것 같으면―. /빌립보서 3:4a/
3) 나도 얼마든지 육체를 ‘신뢰’(πεποιθέναι)할만한 게 있다. (하지만 배설물로 여길 참이다) /빌립보서 3:4b/
여기서 깔아뭉개지는 것은 육체 같지만 실상은 육체가 아닌 ‘신뢰’라는 단어임을 유념할 것이다.
같은 단어를 이 같이 분사, 명사, 부정사로 바꿔가며 변화무쌍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상당한 의식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신뢰’란 무엇이길래? 이 어휘의 원형인 πείθω(설득하다)는 한마디로 ‘기다림’에 그 포괄적 의미가 있다.
‘내가 간청을 통해 성공하다’ 라는 뜻을 추가하여
‘순종/양보…믿다/신뢰하다’뿐 아니라,
심지어 ‘뇌물을 주다’(시험하다)뇌물을 준다는 의미는 머지?
―라는 뜻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의미의 바탕 속에서 ‘믿음’을 뜻하는 πίστις라는 말도 나온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영어 bide(기다리다)와 연관이 있을 법한 고대 게르만어 bīdaną 내지는 원시 인도-유럽어 bʰeydʰ 그리고 당근 라틴어 Fido와 연결된 것으로 미루어, 어떤 ‘기다림’의 의미로서 전체가 통한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보다 앞서 헬라어로 구약성서를 기록한 70인역(LXX)에도 ‘믿음’을 표현할 때 이 πίστις가 쓰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구약성서는 이 명사를 쓰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명사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중요)
그것은 앞서 πείθω 어군이 지닌 속성처럼 어떤 ‘신실성’, ‘성실성’, ‘충실함’ 정도를 표현한다.
그러다가 이 믿음/πίστις가 명실상부한 ‘명사’로서 ‘믿음’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약성서이며, 특히 위와 같은 바울의 본문에서다.
그 중에 위의 빌립보서 3:3-14은 매우 강력한 ‘명사’로의 분립을 담아내고 있다 하겠다.
앞서 말한대로 바울은 저 짧막한 두 구절에서 사실상 ‘믿음’과 거의 같은 의미로 통할 법한 ‘신뢰’라는 낱말을 굳이 3회나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상당히 의식적인 태도로 이해될 수 있다고 일렀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9절에서 언급할 ‘믿음’이라는 단어는 동일한 어근을 지닌 ‘신뢰’라는 말을 완전히 따돌리고서 전혀 다른 개념의 ‘믿음’으로 탄생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미 명사이면서) 비로소 ‘명사’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함은 무슨 말일까?
πίστις는 위와 같은 과정을 위시해 신약 전반에 걸쳐 두 가지 의미로 개진되기 시작하였는데, 1)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지식 기반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타자의 증언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확신, 2) 그리고 그러한 (타자에 따른) 확신이 근거하고 있는 신뢰 자체로서 임한다는 개념이다.
이것이 명실상부 ‘명사’로서 πίστις(믿음)이며 ―전에도 명사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마치 ‘인격’을 탑재한 어떤 것, 즉, ‘믿음’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이르는 말인 것처럼 바울 서신 곳곳에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 1:17.
이것을 일컬어 이른바 ‘칭의’(δικαιοσύνη)라고 부르게 된 것이며, 소위 ‘새 관점’ 학파에서 말하는 πίστις Χριστοῦ(예수님의 믿음으로)도 이 대목을 포착한 것이라 하겠다.
(한 마디로 신뢰는 자기 확신, 믿음은 타자의 증언에 따른 확신. 타자의 증언이란 예수의 증언/예수의 믿음[πίστις Χριστοῦ])
* 상세한 문법적 분해는 여기를 참조.
에필로그.
나에게 믿음이 있는 건지 신뢰가 있는 건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위 바울의 본문에 따르면 믿음이 아닌 신뢰(내지 확신)이 큰 사람은 ‘자랑’을 한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기 자랑을 끼워 넣는다. 심지어는 망한 것을 회고 할 때도 ‘자랑’을 섞는다. 어떤 부흥강사들이 “내가 왕년에 말이야. 큰 거 머 하다 망했는데 말이야ㅡ” 머 이런 식의 어투를 구사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 자랑한다고 일렀다.
이것으로 믿음과 신뢰를 식별하나니.
* 2016.4.10. 부활절 후 제3주 |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 성서일과, 빌립보서 3:3-14. (cf. 사 43:16~21; 시 126; 요 12:1~8.).
신뢰와 믿음에 대해서 검색했는데 이 글이 떴습니다. 저에게 엄청난 통찰을 주는 글이어서 감사히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