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바리새인은 좌파였다 (1)”는 글을 썼을 때 수많은 친구들이 떨어져나갔다.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지만 바리새인이 좌파였다는 사실은 매우 학술적인 관찰의 결과다.

이 글에서는 전편에 다소 생략했던 내용들을 조금 더 기술해놓았다.

예수님 당대에 유대인의 당파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헤롯파(당), 열심파(당), 에세네파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일종의 정파(政派)였다. 왜냐하면 헤롯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당파가 하스모니아 가문(예수님 당대 통치 세력 기반)이 통치하는 것에 반대하여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기독교 전반에 대한 개혁적 인사들이 흔히 우파 인사들을 향하여 ‘바리새인’이라고 지탄하는 것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당대 배경 지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리새인(Φαρισαῖος)인이라는 말의 기원은 ‘파라스’(פרש)라는 히브리어에 담긴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에 두고 있다. 율법에 대해 문외한인 일반 사람들과 당대 헬라 문명 속 이방인 내지는 자기 민족에게서 자신들을 차별화 한다는 그들의 시대적 발상에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바벨론 유배 생활 이후 급변했던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켜내려 한 의인들로 보면 무리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안내우스(Alexander Jannaeus)에 의해 약 800명 정도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을 정도로 행동파에 속한다.

그리고 이들은 특별히 성경에서 언급된 것처럼 사두개파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입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신앙의 노선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두개인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정도의 정보만 담고 있으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전통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실제로 사두개인은 구전 율법을 배척하고 오로지 기록된 모세오경에 쓰인 율법만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해 바리새인은 영혼 불멸 사상, 천사와 마귀론, 영의 존재 등 신구약 중간기에 대두된 폭넓은 교리와 신학을 구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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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바리새인들과 달리 사두개인들이 모세오경을 고수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인하는 용도였다. 모세오경이 규정하는 대로 제사를 바칠 것을 철저히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로마 권력이 인정하는 가운데서 제사만 지속된다고 하면 그들의 부와 권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과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막강한 부와 세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들의 권력은 성전이 존속될 때까지만 향유할 수 있었고,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이들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들에 비하면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계몽적인 집단이었다.

성전은 외세가 파괴할 수 있었지만 성경을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리새파가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전거였다. 우리는 부활의 교리를 먼저 배우기 때문에 이들이 부활을 적극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지 모르는데,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에 관해 부활, 천국/지옥 교리, 그리고 영혼 불멸 사상 따위를 모두 조로 아스터교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대교의 전통은 앞서 말한 대로 사두개파가 더 정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유대교를 헬라 문명 속에서 존속 시킬 수 있었던 바리새파 랍비들의 탁월한 신학적 재능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학적 발전이 반영된 여러 저작 등을 통해서 당대 문화 속에서 유대교 전통은 상당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하는 랍비 유대교의 공적이다. 모세오경에 전수된 ‘문서 율법’ 못지 않게 ‘구전 율법’을  중요시 했던 이들의 노선은 그런 융통성 안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오늘날 흔히 정치 기득권에 기대어 기름끼 흐르는 기독교 인사들을 ‘바리새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잘못된 비유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당대에 정치적인 세력을 얻게 된 것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나 가서야 확보한(사두개파가 사라진 덕에) 교권을 제외하면, 하스모니아 가문과 적대적 관계를 푼 것은 딱 한 번 뿐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왕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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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a from Guillaume Rouillé’s Promptuarii Iconum Insigniorum

그것이 기록된 한 대목이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떠나면서 왕국을 자기 아내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라는 알렉산더가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율법을 범할 때 그를 비난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자기 아내에게 왕국을 맡기면 백성들이 쉽게 그녀의 통치에 복종하리라고 계산한 것이었다. 알렉산더의 기대는 과연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알렉산드라가 경건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라는 큰 어려움 없이 유대를 다스릴 수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실제로 유대의 조상 전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율법을 범하는 자들은 공직을 박탈하였다…[중략]…
한편 바리새파는 알렉산드라가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바리새파는 다른 이들보다 더 종교적이었을 뿐 아니라 율법을 더 정확히 해석하려고 애쓴 유대 종파 가운데 하나였다. 알렉산드라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기려고 한 경건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까지 바리새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에 바리새파는 교묘한 방법으로 알렉산드라의 총애를 조금씩 얻어내 마침내는 정무를 실제로 집행하는 실력자들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제멋대로 적대 세력을 격하시키기고 추방하였으며 기분에 내키는 대로 백성들을 감금하기도 하였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온갖 어려운 일과 비용은 알렉산드라가 맡고 실제 왕권의 행사는 바리새파가 휘두른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NOW Alexander left the kingdom to Alexandra his wife, and depended upon it that the Jews would now very readily submit to her, because she had been very averse to such cruelty as he had treated them with, and had opposed his violation of their laws, and had thereby got the good-will of the people. Nor was he mistaken as to his expectations; for this woman kept the dominion, by the opinion that the people had of her piety; for she chiefly studied the ancient customs of her country, and cast those men out of the government that offended against their holy laws. And as she had two sons by Alexander, she made Hyrcanus the elder high priest, on account of his age, as also, besides that, on account of his inactive temper, no way disposing him to disturb the public. But she retained the younger, Aristobulus, with her as a private person, by reason of the warmth of his temper.

And now the Pharisees joined themselves to her, to assist her in the government. These are a certain sect of the Jews that appear more religious than others, and seem to interpret the laws more accurately. low Alexandra hearkened to them to an extraordinary degree, as being herself a woman of great piety towards God. But these Pharisees artfully insinuated themselves into her favor by little and little, and became themselves the real administrators of the public affairs: they banished and reduced whom they pleased; they bound and loosed [men] at their pleasure; 1 and, to say all at once, they had the enjoyment of the royal authority, whilst the expenses and the difficulties of it belonged to Alexandra. She was a sagacious woman in the management of great affairs, and intent always upon gathering soldiers together; so that she increased the army the one half, and procured a great body of foreign troops, till her own nation became not only very powerful at home, but terrible also to foreign potentates, while she governed other people, and the Pharisees governed her.” ㅡWar 1.5.1-2., cf. Antiq 13.5.9; 13.10.5, 6; 13.16.2; 17.2.4; 18.1.2; Life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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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다시 말하거니와 오늘날 흔히 기득권에 기대어 기름끼 흐르는 기독교 인사들을 ‘바리새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잘못된 비유인 것이다. 오히려 지적하는 깨어있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일 수 있다. 이 사실은 화를 낼 일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재인식하여 제대로 적용해야 할 전거인 것이다.

바리새파가 예수님의 제1 적대자로 성경에서 등장하는 것은 율법에 관한 해석과 순수한 열정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순수한 열정과 해석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상호 간의 사랑을 강조한 율법의 근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으로 이해될 수 잇다. (보다 일찍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두개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포스트 바리새파’의 표상은 비로소 바울을 통해 살아 숨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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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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