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년 때에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고 나서 여러 변화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시 홍대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홍대 앞에서 강남역에 갈 때에는 항상 47번 좌석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 버스가 얼마나 드물게 오는 지, 47분 만에 한 번 오기 때문에 47번 버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예수님 믿고 생긴 변화란, 집을 나서면서부터 ‘하나님, 버스가 와 있게 해주세요…’ 하고 중얼거리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신기하게 버스가 짠ㅡ 하고 대기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10분만 기다리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40분을 기다려야 하기도 했지만 항상 기도를 하였다.
그렇게 20대 초반에 시작한 신앙 생활이 세월이 흘러 흘러 목사도 되었고, 어느덧 지금은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과목들을 가르치는 기회도 갖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 경계를 다룰 정도도 되었다. (물론 지금은 버스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근간에 전공과목을 하나 가르치면서 불현듯 깨달은 사실 하나는, ‘내가 소개하고 있는 신으로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대단히 중요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만, 결국 내가 가르치고 있는 신은 어쩌면 이신론적(deism) 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이신론과 더불어 발흥한 게 근/현대 신학인데ㅡ)
불교의 현자이신 성철께서도 “나를 믿지 말라ㅡ” 고 했던가?
그럴리야 있겠는가만 성령은 그 만큼 이론이 아닌 실제라는 소리.
결국 나를 구원해주실 하나님은 그 높고 깊은 학문적 이론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47번 좌석 버스에서 만난 그 하나님이었다는 사실.
그가 바로 파라클레토스 성령이셨다는 사실.
에필로그.
본문 속에서 말하는 평화/에이레네는 예수님의 소개말을 감안했을 때, 그것은 마치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와 동의어인 것만 같다. (에이레네가 여성 명사니까 밀고나가지 못한 듯)
에이레네가 히브리 샬롬 개념이냐 헬라적 개념이냐 분분하지만 보혜사와 같은 인격으로 보면 무리없으며 여기다 다 적을 수는 없으나 대단히 독특한 평화 개념이다.
체험한 자 만이 안다.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글 하나 적어둔 것도 하나 참조할 만 하다.
cf. 지난 3년 전 회차 성서일과 같은 본문에서는 이렇게 요지를 남겼다.
* 2016.5.1. 부활 후 6주 |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성서일과, 요한복음 14:23-29. (cf. 행 16:9~15; 시 67; 계 21:10, 22~22:5; 요 14: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