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불현듯 “왜 사는지를 모르겠어요. 다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서 가장 명랑한 소녀도 저런 말을 하는가? 해서이다.
걱정보다는 ‘이제 마음의 조직이 시작된건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큰 녀석도 거쳤거니와 이제 이 꼬맹이도 시작인가 하는 생각에 스핑크스 앞에 선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모든 인간의 길.
‘아침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다가, 밤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무엇인가’ 라는 수수께끼를 다 맞춘양 당당히 자기 길을 나서지만 그 자신은 노년도 아니면서 이미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어려서부터 발꿈치를 절어 세 발에 의존해야만 하는 그의 장애(hamartia)는 그가 결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왜?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순간에 조차 자신이 장차 당할 운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왜 스핑크스는 자살한 것일까? 상대가 수수께끼를 완전하게 풀지도 못했는데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설령 풀었다하더라도 그것이 죽을 이유인가?
스핑크스 그(녀)는 한 몸에 두 발, 세 발, 네 발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짐승이자 인간이라는 점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저 인간에게 투영된 자신의 절망을 보고는 언덕 아래로 다이빙 한 게 틀림없다. (cf. 어머니 모티프)
자신의 길을 알고서 살아간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했을까?
도미네 쿼바디스(Domine quo vadis)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주님이 가시는 곳을 물었던 시몬 베드로의 물음도 사실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hamartia)를 반영한다.
“네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자, 닭 울기 전에 자신이 세 번이나 부인 할 것이란 사실도 모르는채 “주를 위해 목숨도 버리겠노라”고 의기양양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그리스도는 아무소리 없이 죽어버린 모성(母性) 스핑크스와는 달리 “근심하지 말라…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은 단지 너도 빨랑빨랑 순교해! 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몸소 저편 넘어로 진입해 본 경험이 있는 자만이 제시할 수 있는 청사진으로 그곳에 임한다.
다시 말해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은 <도미네 쿼바디스>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이는 영화 <쿼바디스>가 대본 삼았던 베드로행전이* 아닌 이번주 성서일과 요한복음서 속 쿼바디스에 관한 주석이다. (cf. 요 13:36-14:4)
이 배경 속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가 나왔다.
에필로그.
어제 교편 생활에서 은퇴하시는 어느 부부 목사님이 개척하시는 교회의 설립예배 사회를 보면서 세 발로 걷는 이들의 걸음이 어찌 이리 맹렬할까-를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신화와는 다른 수수께끼이며 이것이 <쿼바디스>의 화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베드로는 로마에서 금욕생활에 관해 설교를 하였는데, 그 바람에 베드로의 가르침에 감명 받은 수많은 부인들은 남편과 헤어지거나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거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베드로는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의 미움을 사게 되는데, 죽음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베드로는 혼자서 로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뵈었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여쭈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시겠다는 말씀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주님께서 “그렇다, 베드로.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베드로는 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늘로 다시 오르시는 주님을 뵈었다.
마침내 베드로는 기쁨에 가득 차서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