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가 이번 학기에 맡았던 클래스들 가운데 구약학을 듣던 한 여성 전도사께서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 해서 다녀왔다.
그녀에게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은사는 고결하게 간직하되 억제하고 결코 쓰지 마시라-고 권면했다. 그러고는 다음 두 가지 자료를 건네주었다. 하나는 내가 지난 해 7월경에 작성한 주석 문건 하나였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방언과 예언 사용법이 나온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방언하면 통역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방언하면 또 통역을 하고, 예언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예언을 하면, 다음 사람이…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던 듯하다. 이것을 현대에 적용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따른다.
우선 (1) 예언(프로페테오)의 형식이 분분하다. 점치듯 알아맞히는 것도 예언이지만, 상대가 인정하지 않거나 간과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도 예언이기 때문이다. 즉 “당신은 전공(직업)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라는 말은 신점(神占)의 형식으로도 말할 수 있지만 충고의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말할 수도 있다. “술, 담배를 끊으십시오.”도 예언이라는 말이다.
(2) 이것이 기록될 당시 예배 예전과 지금의 예전에는 차이가 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식의 별도의 설교가 없었다. 바로 이 교회활동(activity)이 그것을 대신했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복수의 사람이 차서있게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14:27). 그런데 그 예언이 전혀 지혜롭지도 못하고 엉뚱할 때에, (교회 생활 하면서 모임 같은 거 하다보면 엉뚱한 말 하거나 전혀 포인트 없는 말 하는 사람 때문에 시간 낭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보다 지혜로운 예언에 의해 제지 받아야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32절). 예언으로 어지러웠던 것도 그 때문이며(33절) 특히, 여성을 잠잠하라고 했던 성차별적 명령은 바울이 특별히 여성을 인정치 않는 성차별 때문이 아니라 당시 교육 혜택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던 여성의 발언은 예언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어지러움과 질서를 이렇게 통제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14:37)
사도나 선지자 보다 더 높은 표준이 바로 “편지”라고 말하는 사실도 놀랍지만 “주의 명령이 편지인 줄 알라”고 쓰지 않고 “편지가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표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설교가 나왔고 설교는 그 편지의 표준을 보충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첫째, 설교가 편지의 기능을 상실하면 표준으로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다.
둘째, 설교가 프로페테오(예언) 기능을 상실하면 여러 사람의 방언과 예언을 제도로 독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끝으로 셋째, 교회가 또다시 복수의 프로페테오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초대교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점집으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지러움의 프로페테오를 개혁과정을 통해 다 다듬어낸 게 설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설교가 어지러워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넷째, 설교가 어지러워졌을 때는 복수의 프로페테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로 회귀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연대기별 예언자 목록이다.
문서이전: 엘리야, 엘리사 약 850년경 북이스라엘 아합왕
문서이후: 8세기 아모스 약 750년경 북이스라엘 여로보암2세
호세아 약 745년경 북이스라엘 여로보암2세 스가랴, 샬룸, 므나헴, 브기야, 베가, 호세아
미가 740년경 남유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이사야(예루살렘) 740-700
포로기 이전 스바냐 약 628-622년 요시야 시대
예레미야 약 626-587 요시야, 여호와김, 시드기야
하박국 약 605년경 여호와김
포로기 에스겔 약 593-573년 바벨론
제2이사야 약 540년경 바벨론
포로기 제3이사야 포로후기
학개와 스가랴 약 520-515 예후드 공동체(제2성전시대)
말라기 약 500-450년
이 두 가지를 전하면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권하였다.
전도사님은 “문서 예언자”가 되십시오.
에필로그.
왜냐하면 문서 이전 예언자들은 ‘대머리라고 놀리는 어린이들을 저주해 곰으로 하여금 찢게 만드는’(cf. 왕하 2:23-24), 대단히 추상적인 예언에 종사하지만 ‘문서 예언자’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도가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내 말을 얼마나 신뢰하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핑백: 방언과 예언 사용법 (고전 14:1-40) – Mi Moon Church (美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