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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어왔다. “Yes,” “No,” “Wait.”
그러면서도 언제나 응답은 사실상 “기다림”(Wait)이라는 합의 결론으로 종용해오는 바람에 응답 구하는 당사자는 그 기다림을 볼모로 시간과 물질을 착취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가운데 1:16-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대목에서 그 세 가지 응답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진다.

“<믿음에>라 함은 하나님 그분의 <믿음으로>부터 계시된 것이다. 사멸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대화의 수단이다. 또, 하나님과 처하게 되는 위경을 꺼리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진 대화의 수단이다. 그분의 그 신성한 <‘No’>로써 받아들여진 이들이 그 위대한 <‘Yes’>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반드시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 모순을 회피하지 않은 이들은 하나님 품에 숨긴다. 진솔함으로 기다림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그들은 하나님의 그 <한결같음>을 마땅히 기다려야 하고, 확신케 되고, 또한 그 기다림도 능히 가능케 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깨닫게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 앞에 경외심을 세우고, 들고 일어나려는 조바심을 억누르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다.”

이 주석에 의하면 하나님 응답은 이미 동시에 완료된 것이지 다른 게 아니다.
부정하심(No)의 관문을 열고 들어가 긍정하심(Yes)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그 No와 Yes를 통해 획득한 대화의 수단, 곧 하나님의 <믿음으로 / 한결같으심으로> 우리의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기다림(await)을 대체하였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기다림을 대체한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 응답은 “Yes,” “No,” “Wait”가 이미 동시에 완료된 것이지 무슨 기다릴 만한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니다. 기다림을 볼모로 그 무엇도 착취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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