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은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사실상 이음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고, 또 역사적 문맥에서도 이 셋은 동일한 의미로 서술되지만 각각의 고유한 의미는 다른 것이다. 이 ‘다르다’는 사실은 ‘같다’는 사실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왜 중요한가 살펴보자.

1. 이스라엘인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가 다투다’, ‘싸웠다’, ‘힘썼다’는 동사 사라(שָׂרָה)에서 비롯된 ‘이스라’(יִשְׂרָ)와 하나님의 칭호 ‘엘’(אֵל)이 합쳐서 된 말이다. 즉 “그가 하나님과 싸웠다” 또는 “하나님과 다투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어찌 싸우고 다툴 자가 있겠는가. 그 만큼, (하나님과) 승부로서의 강력한 은유가 내포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과 투쟁하는 민족으로서의 의미인 셈이다.

창세기에는 그 유래가 잘 소개되어 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으로 대변되는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이다. 이 씨름 곧 이 투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פְּנוּאֵל‬)이라는 이름이 그 지역의 명칭으로 부여된다.

이 스토리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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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에서와의 관계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하란으로 도망친다. 잠깐 머물다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약 20년을 소진한다. 그가 고향으로 내려와 노년을 보내고자 이주를 단행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기도가 천사와의 사력을 다한 씨름으로 재현되었다. 여기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신적인 존재와 싸운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자 이 신적인 존재의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때 그에게서 터져 나온 말이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음이니라”(창 32:27)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에 새긴 각인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는 모든 자의 신앙이 되었다.

더러 이 하나님과의 싸움을 이해할 때 불법을 저지르고도 하나님과 투쟁하면 만회될 줄로 차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신앙은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아무 관련이 없다.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의 이행은 그런 그릇된 이해를 표지하지 않는다.

2. 히브리인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을 호칭하는 말이었다(창 14:13). 그러므로 그 기원은 아브라함이라고 보는 것이 명시적인 것이다.

이 히브리인에 대한 유래가 여호수아에 의하여 지지를 받았다. 여호수아는 임종 직전에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아브라함의 아비…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수 24:2-3

여기서 ‘강 저편’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말이 ‘에베르’(עֵבֶר)인데 에베르는 ‘건너다’, ‘지나가다’, ‘나그네의 길을 가다’를 뜻하는 동사 ‘아바르’(עָבַר)에서 유래하였다. 한마디로 에일리언(외계인, alienate)을 뜻하는 이 아바르라는 말에서 ‘이브리’(עִבְרִי‬)가 파생되었다 본다.

아브람이 조상과 함게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을 때 야웨께서 그를 불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게 하였다는 것이다. 강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은 실질적 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어서 황막한 사막이나 여러 어려운 심리적 지형을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는 외로운 나그네라는 의미에서 히브리인이라는 술어가 되기도 한다.

3. 유대인

유대인의 정확한 음가는 ‘예후다’(יְהוּדָה)이다. ‘찬송하다’, ‘칭찬하다’는 뜻으로 ‘성실한 민족’, ‘칭찬 받는 민족’,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 ‘율법을 성실히 준수하는 민족’이 유대인이란 이름의 뜻이 되었다. 창세기를 통해 알다시피 인명에서 시작하여 지파명이 된 명칭이다.

다윗의 왕조가 분열된 후(BC 926) 북(北)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남(南)은 ‘유다’라는 이름을 각각 취하였다. 유다 왕국은 (다윗의) 혈통적 측면에 모토가 있으며, 상대적으로 혈통적 측면에서 소외된 북 왕조는 다른 모토를 찾아야 했는데 다윗보다 선대에 방점이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서 모토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남 유다에 위치했기 때문에 진정한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남 유다가 계승한다고 보는 정서가 정경 일면에 흐르고 있다. 그 정서가 오늘날 근현대의 모든 이스라엘인을 예후다 즉 유대인이라 부르게 한 것이다.

친 유대 정서에서는 오늘의 유대교 즉 안식일 제도, 회당 예배 등 모든 것이 유다에 의해 생성, 발전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북 왕조가 앗수르에 멸망할 때(BC 722) 종교 없이 멸망했다고 보는 관점 때문이다. 아예 북조의 기원은 우상 숭배에서 출발했다고 보기에 예언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으며 율법을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고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 왕조에 종교가 없기는 왜 없나.

북 왕조보다 늦은 시기인 BC 586년에 남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갖가지 종말의 기운이 남쪽에 퍼져나갈 때에 강타한 메시지는 대개 북 왕조 이스라엘의 예언자 텍스트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를 테면 허울뿐인 하드웨어로 전락한 예루살렘 중심 성전 신앙의 그릇됨을 지적한 일은 다 북 왕조에서 남 왕조로 넘어온(북이 일찍 망해서) 선지자 계열의 업적이었다.

세월이 흘러 페르샤의 고레스가 세계의 패권을 쥐었을 때 정치적으로는 강압적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유연한 정책을 폈다. 일방적으로 종교까지 탄압한 게 아니라 각자가 믿는 각자의 신앙을 허락했던 것이다. 특히 이런 정책을 통해서 스스로를 덕의 화신이라 여겼다. 이때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은 바벨론 현지에서 율법을 재정비하고 안식일 제도를 복원하고 크네셀트라는 회당 예배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되어 전통 복고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에스라라는 이름은 그 주역이 되었던 학사의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가 BC 538년 고레스 칙령에 의해 본국으로 귀환하는 기회를 거머쥐게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포로기가 우상숭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깊은 반성과 각인 속에서 강력한 물리적 정경 운동이 펼쳐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진멸법으로, 이족혼을 모조리 갈라 내는(기혼자까지) 신명기법으로 전개되면서 ‘사마리아’라는 영토적, 민족적, 종교적 경계가 새롭게 규정지어진 것이다.

이때 채용된 이름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명칭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명제를 유념할 것이다.

현대 유대인은 ‘히브리인’인가? ‘이스라엘인’인가? ‘유대인’인가?
현대 메시아닉 쥬는 ‘히브리인’인가? ‘이스라엘인’인가? ‘유대인’인가?
현대의 예슈아는 ‘히브리인’의 칭호인가? ‘이스라엘인’의 칭호인가? ‘유대인’의 칭호인가?

시오니즘이라는 재건운동도 위와 같은 배열속에서 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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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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