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의 기원
중국의 노름인 마작은 수·글자·식물로 된 류(類)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의 노름은 여러 류의 꽃이 주된 구성이다. 우리나라 화투는 이 일본 노름인 하나후다(はなふだ)를 들여온 것이며 ‘꽃-싸움’을 뜻하는 화투(花鬪)란 말도 꽃패라는 뜻인 하나후다(花札)에서 유래하였다.
마작은 기본적인 류에서 다른 조합의 류로 먼저 재구성해 승리를 점하는 놀이인 반면, 화투는 1월, 2월, 3월… 12개월의 상징인 ‘화패’가 ‘수패’로 조합되어 승리를 점한다. 화패의 주제인 꽃들이 각 계절을 상징하는 셈이다. 일본에 이런 독창적인 수패 도상(圖像)이 생겨난 것은 이른 시기부터 교역하게 된 서양 가톨릭(신자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서양 카드가 유입된 것이 에도 막부 시대 말기 때 서양 카드 금지령으로 인해 창의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 서양 노름은 ♠모양의 ‘스페이드’, ◆모양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하트’, ♣모양의 ‘클럽’이 기본적인 류이다. 이것이 본래는 ‘검’, ‘주화’, ‘잔’, ‘곤봉’ 모양의 심벌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는 없으나, 신분계급으로 순위를 점하는 놀이였음에는 틀림없다. 검-기사계급, 주화-상인계급, 잔-성직계급, 곤봉-평민계급으로 유추하든, 스페이드♠-성직(또는 왕족), 다이아몬드◆-귀족, 하트♥-평민(또는 성직), 클럽♣-천민(또는 평민)으로 유추하든, ‘수패’로 치환되는 방식이 꽃 따위의 정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모종의 계급을 유추시키는 동적 기호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기의 류 내에서 또 한 번 분류된 K·Q·J 이니셜은 신분계급을 더욱 분명히 한다. 왕(King), 여왕(Queen), 신하/기사(Jack), 각 신분의 도상으로 명백한 계급을 표지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통상 스페이드 킹은 다윗 왕으로 지칭한다. 아울러 스페이드 퀸은 아테네를, 다이아몬드 킹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이아몬드 퀸은 성서에 나오는 요셉과 벤야민의 어머니 라헬로 통한다. 또한 하트 킹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로, 하트 퀸은 헬레네 또는 유디트로 지칭한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 그리고 라헬이나 유디트 같은 유대-기독교 전승이 혼합된 것은 서구사회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왕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이 카드 패를 다 차지했으면서도 이 계급들 중 어떤 류에도 끼워주지 않는 신분 한 종이 있다. 바로 조커다. 그래서 조커는 본래 ‘없는’ 카드이다. 실제로 카드 제작자가 계발하는 과정에서 추가한 블랭크카드 또는 와일드카드로서 당초 아무런 기호나 도상도 부여되지 않았다.
단지 기능적으로만 나머지 모든 류의 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했다. 그래서 그것은 게임의 전체 판도를 일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권능의 카드이다. 높은 수패를 가졌어도 상대가 조커를 조합해 일시에 우위를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카드에 제작사명 정도나 찍어 발행했던 것을 오늘날 우리가 조커라 부르게 될 인물의 도상 즉 제스터(Jester, 광대)를 그려넣기 시작하면서 아예 ‘제스터=조커’로 동일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도안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제스터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었지만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정확한 적용이기 때문이다.
조커의 상상계(상상의 세계)
오페라 <리골레토>는 역사적 조커의 지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여성을 정복하는 일상만이 삶의 의미인 만토바 공작에게 광대 리골레토에게 아름다운 첩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전도유망한 젊은이로 변장한 공작이 그녀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리골레토의 첩이 아닌 딸이었다. 이에 분개한 리골레토는 자객을 보내 공작을 죽이려 했지만 공작을 진실로 사랑한 딸 질다는 결국 공작 대신 죽고 리골레토는 실신하고 만다.
이 이야기는 천한 신분의 광대가 어떻게 높은 신분들 곁에서 은신하며 살았는지 보도한다. 이런 유력한 자들의 전속 광대를 궁정광대(a court jester) 또는 직언광대(a licensed jester)라 불렀다. 다이아몬드◆들 곁에서 그들이 즐거움을 독점하도록 돕고 동시에 중요한 결정에도 조력하는, 재능 있는 신분이었지만 ‘없는’ 신분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다이아몬드◆들의 봉건 사회에서 넘어와 클럽♣들의 민주사회가 되면서는 즐거움도 개인화된 까닭에 광대들은 그 개인화된 즐거움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꿈꾸게 되었다. 영화 <조커>에서의 조커 아서 플렉이 그런 사람이다. 대중에게서 관심 받고 싶은 사람이다.
환경미화원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쓰레기가 넘쳐나는 도시(市) 고담, 그래서 쥐 떼가 넘쳐나는 더러운 도시이지만 아서 플렉은 사람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고자 꿈꾼다. 하지만 아직은 유명하지 않다. 광대 복장하고 상점의 개/폐업 이벤트를 대행해주거나, 어린이 병원에서 병상의 어린이를 즐겁게 해주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그런데 아서 플렉에게는 장애 하나가 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장애이다. 웃지 말아야 할 순간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고, 정작 웃겨야 할 때는 웃음을 주는 공감능력이 부족하다. 대중에게 웃음을 줘야하는 직업으로서는 치명적이다. 한마디로 장애는 웃음 병 자체가 아니라, 웃겨야 할 때는 웃음을 주지 못하고 웃지 말아야 할 때는 숨이 끊어지도록 웃는 소통의 장애이다.
이런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특히 그것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아서 플렉은 망상장애를 겪는 어머니를 평생 보살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해피야~’하고 불러주셨기에 자신은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성장해왔지만, 결국 그 웃음 구멍이 망가진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으며 자신은 웃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극도로 분노를 했어야 하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자기 정체성은 자리 잡혀간다. 폭력적인 분노를 발산하고서야 안정감을 찾았다. 살인자가 된 것이다.
필경, 이때 관객들은 아서 플렉이 초기에 등장할 당시 분장했던 광대 모습과 자기 정체를 깨달은 뒤의 광대 분장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다. 광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릿광대(Clown)와 피에로(Pierrot). 어릿광대는 웃는 얼굴이고, 피에로는 슬픈 얼굴이다. 상점 이벤트나 어린이 병원에 갈 때마다 어릿광대였던 아서 플렉은 이제 더 이상 그런 분장을 할 필요가 없다. 슬픈 광대 모습을 하고서야 더 잘 웃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체성을 찾게 되자 자기가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일의 본질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저지른 첫 살인 당시 광대 복장을 하고 있던 것이, TV뉴스나 매스컴에서 대서특필되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흡족해진 마음을 체험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제야 자신을 알아보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직 상상 속에서만 사람들의 관심을 누리던 자기 모습이 이제야 현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커’를 본질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실제는 외면당하고 무시 받았다면, 이제 ‘없는’ 존재로 존재를 선언하니 사람들은 자기를 본떠 광대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시위하고 열광하기에 이른 것이다. 모두 상상계에 갇혀 지내다 현실로 튀어 나온 것이다.
조커의 현실계(현실의 세계)
한 가정에 빈곤이 덮쳤을 때, 혹은 가족의 한 성원이 깊은 환우에 빠졌을 때, 그 가정은 강력한 소외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우환이 아니더라도 노환(老患) 즉 ‘늙는다’는 현실 자체는 보편적인 소외의 류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외는 인류가 자본주의 경제를 통해서만 가장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비록 봉건적 신분계급이 경제적 신분계급으로 이행하였지만, 기사계급으로 변신한 공산당원들이 모든 다이아몬드◆를 싹쓸이 하는 공산주의보다는 공평한 것이었다. 개인화된 모두가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소외를 틈타 지역마다 조커 같은 정치가 또는 행정가들이 ‘몽둥이’ 기호 대신 ‘클로버’♣ 기호를 차고 출몰해 기승을 부린다. 이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Happy!”를 부르짖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망상에 빠진 엄마가 “Happy야~” 하고 부르는 소리 같아 섬뜩하다. 그들의 대다수는 ‘웃음’(의 삶)이 공약이었지만 그 웃음은 결과적으로 피에로의 입을 강제로 찢는 도상이 되고 말았다. 웃음 구멍을 고장 내고 만 것이다. 시민들을 웃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전혀 웃기지가 않다. 그런데도 이 권력은 웃음을 멈출 줄을 모른다. 웃지 않는 자는 입을 찢을 기세다. 이것이 이 정치 조커들의 현실계인 것이다.
영화 <조커>의 감독 토드 필립스는 본래 코미디 영화 전문 연출가였다. 코미디 감독이 호러물에 도전한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는 코미디 제작에서 떠나게 된 데 대해 “Woke Culture”를 이유로 들었다. PC(정치적 올바름)의 문화 버전인 이런 정서 때문에 코미디가 안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허리우드 분위기를 우리가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 사회의 문화 분위기로 적용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기생충>, <택시운전사>, <변호인>, <설국열차>… 이런 조커들이 웃음을 잠식해버림으로써 저 정치 조커들을 조력하는 것이다. <개그 콘서트>의 괴기스런 입모양도 대표적인 안방 조커의 예이다.
모든 사람은 노름에 빠져 살기 마련이다. ‘놀이’를 방법론으로 구현하는 인문학에 따르면 마작과 화투만이 노름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가 노름(놀이)의 스키마 속에 살아가는 것이며 이 스키마가 붕괴될 때 삐에로/조커가 된다는 말들을 한다.
우리 내면은 언제나 1월의 추운 꽃, 2월의 쌀쌀한 꽃, 3월의 움트는 꽃…. 그러다 다시 쌀쌀한 11월의 꽃, 그리고 12월의 하얀 눈꽃. 이들을 인식하면서 우리 삶에 쥐어진 패가 좋은 패든, 나쁜 패든, 또는 싫은 패든 묵묵히 살아가도록 단련되어 있었다. 이 판을 평화의 이름으로 웃음의 명목으로 일시에 뒤집어엎는 조커 정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들이 갑자기 등장함으로 웃음과 슬픔의 놀이판이 전복되고 만 것이다.
시학(詩學)에 따르면 코미디는 기형이다. 그리고 비극이야말로 즐거움이다. 무슨 소리냐.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아내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에게 시곗줄을 선물하고, 남편은 시곗줄 없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빛나는 머리카락을 위해 빗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는 비극적인 슬픔이다. 하지만 즐거운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13번째 사도 바울이 평생을 헌신하고, 그리고 그 누구보다 위대한 공적을 세웠지만 결과는 참수로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비극적인 슬픔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제자의 류(類)들에게는 비장한 즐거움이다.
어제 한 관공서에서 연출한 ‘국민과의 대화’를 보았다.
<조커>의 클라이막스 한 장면을 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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