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25전쟁 70주년은 어떤 해보다 의미심장한데도 언론에서조차 입을 닫는 분위기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오늘은 6·25전쟁 휴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 관련 타임지 기사 몇 개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번에는 타임지 커버 스토리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 기사를 소개한 바 있다. 시기가 전시였던 만큼 이승만 대통령에 옹호적인 논조였다면 오늘 소개하는 기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애를 먹고 있는 미국 입장에서의 가감 없는 논조를 반영한다. 특히 휴전 협정을 둘러싸고 그가 미국과 분열한 모습이 잘 드러난 내용들이다. 그런 치열한 중에 나라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노인’의 헌신을 유감없이 보여주기에 눈물겹다.

박정희는 독일에가서 광부와 간호사 앞에서 울었다고 들었는데, 이승만은 미국 앞의 천덕꾸러기를 자처한 듯하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아래 짜투리 기사들과 더불어 커버스토리 두 편을 모두 정독하면 좋다. 이승만: 타임즈 커버스토리 1편, 2편)

이승만의 동맹들
1952년 7월 7일자 기사

동맹들. 이승만은 기다릴 줄을 안다. 하와이와 미국에서 추방된(그는 프린스턴에서 Ph. D. 학위를 받았다) 그는 약 40년간 일본 사람을 앞질렀다. 일본인보다 훨씬 단 기간에 그는 자신을 비난하던 유엔을 앞질렀고, 그를 제거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남한 내 정적들을 따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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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5주 동안의 계엄령을 정적들 머리 위에 쏟아 부은 후에 그는 자신의 무기한 대통령 임기를 연장했다. (6월 23일까지 국회가 새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헌법에 대한 위반이다.) 이승만은 부산 근처의 한 온천 리조트에서 개최한 연회에 반대자들 중 일부 온건한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들이 처한 어려움에 관한 타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함이다. 연회를 마친 후, 그들 중 37명은 국회에서 애매하게 침묵하는 정족수를 제공했다. 60명의 친이(親李) 소수파는 만장일치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아슬아슬한 탈출. 다음날 이승만이 6·25전쟁 2주년 기념 모임에서 6천여 명의 군중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데 연단 뒤편에서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독일제 자동 소총을 이승만을 향해 내밀었다. 미(美) 장교 허버트 하몬 대령이 발로 차 그 자객을 제압했다. 단상에 있던 한국인들이 내려가자 하몬 대령이 목을 조르고 있던 그 자객을 다른 미군 장교가 와서 무장해제했다. 조용하게 치러진 이 난투극은 군중의 시선을 피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승만의 친구이자 야망에 찬 내무장관 이범석이 그것을 다 보고 있다 군중들에게 대통령의 이 ‘아슬아슬한 탈출’을 알리고자 대통령(의 말)을 가로막았다. (불과) 28분 후, 친이계 신문들의 호외가 거리에 깔렸고, 살인 시도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경찰은 암살범을 중국 테러조직의 일원으로 특정하고, 노인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진 국회의원을 체포했다.

울먹이는 국회의원들. 다음 날 이승만의 지지자들 600명은 국회를 둘러싸 포위하고, 안에 있던 80명의 반이(anti-Rhee) 국회의원을 붙잡아 사퇴 또는 다른 뭔가를 요구했다. 5시간 15분 동안 국회의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웅성거렸고, 이승만의 경찰이 대기했다. 마침내 나타난 이범석이 부하들에게 시위대를 밀어내고 국회의원들을 나가게 하라고 명령했다. 완전히 주눅이 든 채 국회의원 일부는 울먹이며 국회를 걸어나갔다.

자신을 확신하게 되자 이승만은 더 관대해졌다. 그는 과거 자신이 지나치게 자기 입장을 설명하기에 급급했던 것을 인정했고, 미국과 유엔에 대한 저항감을 털어냈다.
그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재개되는데 동의했다. 심지어 3주 동안 운영되어 온 언론 검열을 비난했다. 이승만은 천연덕스레 말했다.

“그런 관습들이 존재한다면, 즉시 폐지되어야 한다.”

국민의 선택
1952년 7월 14일자 기사

남한의 유권자를 제외한 그 모두가 77세의 이승만을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엔은 이승만 대통령의 고압적인 국정 운영 방식에 못마땅해 하며 혀를 찼다. 남한 국회의원 대다수는 난폭했으며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국민께 여쭈어라.”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으로서 그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야당 의원에 의한 이승만의 재선에는 의심의 여지가 분명 있었다. 이승만은 국민에게 그들의 대통령을 선택할 권리를 주는 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개정안 통과를 거부했다. 이승만은 반대파 중 많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경찰을 보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리고 국회를 완전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지난 주, 반대파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면서 이승만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의 원래 요구를 모두 포함시키면서(그 중에서도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의 내각 임명권을 총리와 국회에 양보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이승만은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여전히 이러한 임명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타협안으로는 별것 아니었지만, 이승만의 탈진한 적대자에게는 이승만이 미국이나 그를 향해 혀를 차는 그 어떤 세력의 도움으로부터도 절망하는 모습은 그렇지 않은 모습보다는 나아 보였다. 감옥에서 풀려나 이승만의 경찰들에 의해 은신처에서 쫓겨난 그들은 순순히 그의 세력에 합류했으며 163대 0으로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마침내,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국민의 선택을 확신했다.

휴전 논의: 보수주의자
1953년 6월 29일자 기사

유엔은 휴전할 용의가 있는 적과 휴전을 파멸로 보는 주요 동맹국 사이에 갇혀 있었다. 판문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아마도 모두 정전 협정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 완고한 노인 이승만은 유엔이 중립위에 넘기기로 약속한 2만 7000명의 북한 전쟁포로를 석방해 휴전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행동으로 북한 주민에 관한 한 지금까지 강제 송환 문제를 거의 해결했다. 그는 그들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전쟁 종식에 대한 유엔의 희망에 큰 타격을 주고 말았다.

판문점에서의 회담이 중단된 것이다.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이승만은 1950년 유엔군 사령부 산하에 두었던 협정을 위반했다. 또한 그는 마크 클라크 장군과 엘리스 브릭스 미국 대사와의 약속을 거듭 어겼다. “전면적이면서도 솔직한 논의를 하기 전까지는 한국군에 대한 일방적 행동을 개시하지 않겠다”는 클라크와의 약조를 어긴 것이다. 화가 난 미군 병사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를 돕기 위해 이곳까지 왔건만, 이제 그는 우리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마크 클라크는 “우발적이고도 충격적인 행동”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하겠노라 경고했던 일을 한 셈이었다. 유엔군 사령부와 세계 각 나라들은 이승만을 위협이 될 수 있지만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소란하지만 힘이 없는 노인으로 오랫동안 간주해왔다. 하지만 이제 끔찍한 깨달음이 현실이 되었다. 아마도 이 노인이 말했던 경고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승만에게 포로 석방은 전적으로 일관된 일이었다. 자유롭고 통일된 한국을 위해 싸운 반세기가 넘는 동안,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부터 동맹국과의 개방적인 휴식에 이르는 1953년까지 무엇이든 준비되어 있었음을 그의 행동을 통해 분명히 했다.

실용적 질문. 이승만이 휴전할 기회를 모두 소멸시켰을까? 모종의 휴전이 여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징후는 (오히려) 적군 사령관 김일성과 펑더화이로부터 나왔다. 놀랍게도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마크 클라크에게 보낸 놀라울 정도로 온화한 서한에서 미국이 이승만과 포로 석방을 위해 ‘방조’했다고 비난하면서도 회담 결렬에 관해선 위협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클라크 장군에게 적절하고 실용적인 질문을 했다.

“유엔사령부가 남한 정부와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휴전에는 이승만 패거리(clique)가 포함되어 있는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정전협정 이행을 위한 한국측의 어떤 보장이 있는가?”

추천 상자
1953년 9월 21일자 기사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에서의 휴전 저지 공작에 대한 모든 분노에 관해 지난 주 유엔은 이 ‘노인’의 전술이 한국에서 그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그 해는… 대통령 지위 강화에 따른 특징이 있었다”고 유엔 통일재활위원회는 말한 것이다.

위원회의 판단을 확인이라도 하듯 이승만은 여전히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한국 정치의 치열한 각축전에서의 오랜 경험은 이승만에게 확신을 주었다. 남한 내에서 이승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에게 실질적 정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질서 있는 정부에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승만의 확고한 통치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지난 주에 대통령은 강력한 재정부 수장 자리에 있던 백두진에게 사임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규모에 맞게 그를 강등시켰다. 그에게 총리라는 직책만 남겨둔 것이다.

다음날 이승만은 ‘이승만 경찰’의 전임 책임자였던 강력한 장군 이범석에 대한 용무로 갔다. 친이계 편집인 3명이 수감되어 있었고, 이승만은 내무부 장관으로서 경찰력을 운영했던 이범석의 지지자인 진홍식을 해임했다. 이와 동시에 이 대통령 영향 하에 있던 한국의 모든 준 군사적 청년 운동을 해산하고 그 기구를 이승만이 통제하는 ‘국민 의병’으로 대체, ‘18세부터 40세까지의 청년들’로 구성하였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 이 대통령은 정부 관료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인 인맥에 의한 인재 공급이 거의 바닥이 난 그는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 파란색 커다란 상자를 놓고는 그 위에 이런 글씨를 써붙여 놓았다.

‘유능한 사람을 추천하는 상자’

힘든 사람
1953년 9월 21일자 기사

먼지투성이의 서울 거리를 헤치고 이승만은 크고 푸른 색 링컨을 타고서 만남의 장소에서 만남의 장소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차는 한국에서 움직이는 거의 유일한 민간 차량이었다. 미국의 석유 공급 금지가 발효되면서 버스가 멈추고, 어선이 한가하게 쉬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자전거로 출근했다. 트럭이 없어 농장에 쌀이 쌓여갔고, 마을에는 2만 5천 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실직하고 배를 쥐고 굶주렸다. 서울의 눈물 속에서 이런 말이 나돌았다.

“노인네가 매를 맞았다.”

수요일이 지났을 무렵 완고한 ‘노인’ 이승만은 포기하고서 엘리스 브릭스 미 대사에게 미국 석유와 달러 유통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을 물었다. 브릭스는 사실을 말했다.

“4개월 전 워싱턴에서 약속했던 일을 하시라.”

이승만은 순순히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미국이 180환 대비 1달러(500~1달러 이상의 자유시장 금리)의 ‘공식적’ 금리로 한화를 사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포기하고, 현재 310~1달러 금리는 수용하고 미래에 ‘현실적’ 금리를 약속한다.

한국군 15개 사단에 대한 그의 요구(그리고 그들과 함께 스스로 한국을 통일하기 위해 “북진하라”하려는 그의 꿈)를 버리고, 그가 워싱턴에서 받아들였던 10개 사단과 75대의 전투기 계획에 만족하라.

지원금의 최소한 25%를 일본에서 쓸것. 이것은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고, 일본을 극혐하는 이승만이 공식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100% 효과를 낸 3년간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종식시킬 것.

한-미 상호방위조약 비준을 미루고 있는 그의 고집을 포기하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어느 한쪽이 1년 전에 파기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기 때문.

이 고착 지점들은 처리되어, 양국은 1954-55년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미군 지원 프로그램인 2억5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와 4억5000만 달러의 군사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승만은 도와주기 힘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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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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