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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 JIN LEE
    키 마스터

      어미가
      ה ָ
      그리고 ת로 끝나는 것은 여성형으로서의 표지.
      그러므로 상기의 명사 어미 변화 패턴의 dual 여성형에서 ת가 빠져 남성 dual과 같게 된 것 체크 요.

      YOUNG JIN LEE
      키 마스터

        12세기 중세 가톨릭은 임신한 태아의 영혼을 이해할 때
        “영혼 없는 태아”에서 “영혼 있는 태아”로의 발전단계로 규정하다가

        13세기 들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남자의 배아는 임신 40일 후에, 여자 배아는 90일 후에 “영혼이 불어 넣어진다”고 다소 미개한 규정을 하였다.
        이 대목이 오늘날 낙태합법화를 주장하는 좌파 학자들의 단골 메뉴가 되곤 하나(영혼이 없으니 삭제해도 된다는ㅡ)

        실상 당대에는 40일짜리 남자 배아를 낙태하는 짓을
        여자 배아 낙태하는 행위보다 더욱 엄벌에 처하였다.

        병력이 될 소중한 자원을 소멸시켜버린다는 이유에서였으나,

        사실 태아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어찌 알았겠는가
        X-레이가 있었나 초음파가 있었나ㅡ
        그냥 그렇게 낙태를 엄금하고 방지하였던 것이다.
        따라하려면 다 따라하시라
        유리한거 한 면만 말고ㅡ

        답변: 모든 민족(all nations)은 누구인가? #4233
        YOUNG JIN LEE
        키 마스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1. 양과 염소, 두쪽으로 갈라질 ‘모든 민족’(all nations)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이 최후의 심판 규모와 규격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2. ‘모든 민족’이 누군지를 밝히려면 그들을 심판한 심판 기준이 뭔지를 알아내야 한다. 심판 기준이 다 나와 있는 것 같지만 매우 정교하게 되어 있어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3. 마태복음의 이 최후의 심판 본문은 에스겔서 34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사실에 우선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겔 34:17)

          4. 그러나 에스겔 시대와는 중요한 차이점 하나가 발견된다. 마태복음은 마치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으로 읽히는데 반해, 에스겔서는 양은 양끼리, 그리고 염소는 염소끼리(정확히는 숫염소에서 숫양을) 그 안에서 갈라내고 있다는 사실, 즉 두 집단이 각각 별개로 심사 받고 있는 점이다.

          5. 따라서 마태복음의 최후의 심판을 읽을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는 ‘양’은 양이기 때문에 구원 받고, ‘염소’는 염소이기 때문에(눈알이 왠지 재섭서?) 지옥간다ㅡ는 식의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선입견이 오른편은 오른편이기 때문에 구원 받고, 왼편은 왼편이기 때문에 지옥간다는 기준의 매몰을 불러 오는 것이다. 그런 본문이 아니다.

          6. 오른편 양들과 왼편 염소들은 완전히 다른 분류임을 유의해야 한다. 양들은 양들끼리 따로 분류 심문을 받고 있다. 염소는 염소들끼리 따로 분류 심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7. 이 두 집단을 따로 분류한 가장 중요한 키는 이것이다.
          오른편 양들에게는 →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떤 처우를 했는지를,
          왼편 염소들에게는 → “(내 형제가 아닌)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떤 처우를 했는지 심문한다.
          또한, 오른 편에게는 → “행했던 일”에 대한 심문을,
          왼편에게는 → “행하지 아니한” 것을 심문하고 있다.
          둘은 이미 완전히 다른 집단인 것이다.

          8. 그렇다면 양들은 누구이고, 염소들은 누구인가? 양들은 유대인이고, 염소들은 비유대인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이 ‘모든 민족’을 두 인종으로 가르는 절대 준거는 하나, “행한” 집단과 “행하지 않은” 집단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 마디로, 행함으로 영생에 들어가고, 행하지 않음으로 영벌에 들어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이 아닌 행위란 말인가??

          9. 이러한 연고로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가톨릭은 이들 여섯 가지 행함 덕목에 ‘죽은 자를 장례 치러줘라’는 항목까지 추가해서 아예 ‘일곱 가지 자비’(The Seven Works of Mercy)를 만들어 실천을 강조해온 바 있다.
          1) Feed the Hungry(주린 자를 먹이라),
          2) Give Drink to the Thirsty(갈한 자를 마시게 하라),
          3) Clothe the Naked(벗은 자를 입히라),
          4) Shelter the Homeless(집 없는 자를 맞으라),
          5) Visit the Sick(병자를 방문하라),
          6) Visit the Imprisoned(옥에 방문하라),
          7) Bury the Dead/죽은 자를 장례 치러줘라

          10. 하지만 이 여섯 자비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준거가 아니라,
          “행함”으로 영벌에 들어가는 준거인 셈이다. (매우 중요)

          11. 다시 말하면, (여전히)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영벌은 자기가 행한 행위(행치 않음의 행위)로 받는다는 사실이다.

          12. 따라서 이 양과 염소의 최후의 심판에는 두 가지 경우가 은폐되어 있다 할 수 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지 않은” [양]들은 어찌 되는 것인지…
          “(내 형제가 아닌)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염소]들은 어찌 되는 것인지…

          13. 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가톨릭은 연옥의 교리를 만들게 되었고, 개신교는 자신들의 구원의 최저치를 영생과 동급의 최대치로 과신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구원파가 여기서 나옴).

          14. 영생과 영벌 가운데 영생은,
          율법을 다 준수했던 부자 청년도 들어갈 수 없었던 바로 그 단계이며, 위험을 무릅쓰고 심야에 그리스도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런 단계인 것이며,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15.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나 “(내 형제가 아닌)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나 모두 그 임금으로 오신 인자에게 행한 것과 동일하다는 심판의 일치.
          그리고 양들 중에서 자신이 양인 줄 착각하고 있던 자들은 왼편 집단으로의 이행 가능성(cf. 겔 34:17. 숫염소에서 숫양을/숫양에서 숫염소를).

          16. 끝으로 이 구원의 최대치 가늠자 노릇을 했던 ‘형제 중의 지극히 작은 자’가 중요한데, 이들은 오늘날로 치자면 가난한 선교사 또는 미자립 교회 목회자 정도가 될 것이다.
          (cf. 마 25:31-46; 겔 34.)

          YOUNG JIN LEE
          키 마스터

            그런 점에서 프뉴마는 바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바람 즉, 호흡이다. 네샤마? 차라리 우리의 호흡으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받은 성령은 뭐냐 할 것이다.
            그래서 교단들이 나뉘고 생겨나는 법이다ㅡetc.

            그러면 일반 호흡과 성령이 어떻게 구별 되는가ㅡ
            그것은 오순절 다락방 쑈크로 추가로 얹어지는 ‘바람’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존재라는 이유 만으로 분여된 호흡이 세례와 성찬의 분여를 통해서 더 나은 호흡로 구별되는 것이라고 이해함이 타당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영은 똑똑 끊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ㅡ

            YOUNG JIN LEE
            키 마스터

              이 문제와 연하여 ‘(다른)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가?’라는 논지에 관하여:

              전도서 3장 21절에서 거두겠다는 (영)혼은
              ‘영혼’이 아니라 19절에서 언급한 ‘호흡’이다.
              본래는 둘 다 ‘바람'(רוּחַ/πνεύμα)인 것을 그리 번역한 것뿐이다.
              이 호흡/바람을 어디서 받았느냐ㅡ
              바로 창세기 2장.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 네페쉬가 되고 동물은 사람에게 이름을 받아 네페쉬가 되고,
              둘다 똑같이 네페쉬가 되었는데
              이 네페쉬(נֶפֶש)를 영혼(ψυχή)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영혼이 없다고 하지를 말든지,
              아니면 Mind(νοῦς)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카톨릭의 경우는 아퀴나스 덕택에 자연에 대한 비교적 너른 이해를 유지하였으나,
              개혁자들은 교의학을 재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어서인지 자연/생태 이해를 조직신학 속에 봉인시킨 일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아무 가책없이 보신탕도 잘 먹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는 발언은 대단히 무지한 표현이다.

              YOUNG JIN LEE
              키 마스터

                구약성서에서는 신앙으로서의 어떤 명사적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명사적 신앙 형태로서 가장 이상적인 하박국 2장 4절의 emoona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신실함’(꾸준함)의 다름 아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명사 πίστις와 그리고 그것의 동일어족인 동사 πιστεύειν이 사용되고 있다.

                πίστις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첫째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지식과는 구분된 어떤 사람이나 그의 증언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확신, 둘째 그러한 확신이 근거하고 있는 신뢰 자체로서이다.

                그럼에도 70인역에서는 ‘확신’ 혹은 ‘신뢰’라는 의미가 중요시되는 신약성서의 용법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πίστις 명사보다는 πιστεύειν라는 동사에서 더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πίστις가 수동적 의미 즉 구약성서에서의 통상적인 의미인 ‘충성’ ‘신실함’을 나타내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롬 3:3; 강 5:22; 딛 2:10). 매우 능동적 의미로 사용된 편이다.

                빌 1:27; 고후 4:13; 살후 2:13, 특히 요한문헌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개인적 담지가 아닌 타자의 증언을 토대로 그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지적 신앙 혹은 확신으로 나타난 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속과 미래의 복을 목적으로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뢰 혹은 확신(바울서신들, 가령, 롬 3:22, 25; 5:1, 2; 9:30; 빌 3:3-11)이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를 의지하는 명사적 형태, 바로 그것을 믿음으로 제정한 것이다.

                YOUNG JIN LEE
                키 마스터

                  πίστις라는 말은 πείθω의 어근인 πιθ-와 -σις가 합치면서 치경음(δ, θ, σ, τ)이 남은 상태인 -τις로 변해 된 말이다. * πιθ-τις > πιστις
                  (아테네식 접미사는 -σις고 코이네식은 -τις다)

                  그렇다면 πίστις의 몸체인 πείθω는 무엇이며 그 어근 πιθ-는 무엇인가?
                  πείθω는 ‘설득하다’라는 뜻이 제1의적이며 ‘간청을 통해 (내가) 성공하다’, 그리고 ‘뇌물을 주다’(시험하다)와 ‘순종/양보…믿다/신뢰하다’는 뜻까지 통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bide(기다리다)를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 bīdaną내지 원시 인도-유럽어 bʰeydʰ 그리고 라틴어 Fido와 연결되어 있다.

                  πέποιθᾰ가 πείθω의 완료형 능동태이고, Perfect: πέπεικᾰ, πέπεισμαι가 있고, Perfect: πέποιθᾰ (passive sense)가 있으며, Pluperfect: ἐπεποίθειν/ἐπεποίθη (passive sense)도 있다.

                  πεποιθέναι는 부정사 곧 Verb: 2nd Perfect Act Infin이다.
                  πεποιθότες는 분사 곧 V-RPA-NMP/ Perfect Active Participle Nominative Plural Masculine다.

                  그러면 여기서 사실상의 믿음을 뜻하는 πεποιθέναι와 πεποιθότες를(왜냐하면 ‘신뢰’를 뜻하므로) 배설물의 위치에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즉 완료시제 πέποιθᾰ또는 πεποιθότες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사 πεποίθησιν마저도 배설물에 위치하고 πίστις를 고결한 믿음으로 구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πιστεύω라는 동사는 πίστις에서 된 동사다.
                  그러나 πεποιθέναι 또는 πεποιθότες 또는 πεποίθησιν는 모두 πείθω-에서 비롯된 믿음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득하거나, 간청을 통해 (자기가) 성공하거나 심지어 뇌물을 주어 달성하는 그런 믿음과는 다른 믿음으로 구별된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YOUNG JIN LEE
                  키 마스터

                    πεποιθότες는
                    Perfect Active Participle Nominative Plural Masculine

                    Masculine
                    Single
                    κως
                    κοτος
                    κοτι
                    κοτα
                    plural
                    κοτες
                    κοτων
                    κοσι
                    κοτας

                    Petra. p. 145

                    현재분사변화
                    Sin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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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λύοντα
                    plural
                    λύοντες
                    λύοντων
                    λύουδι ν
                    λύοντας

                    Machen’s p. 98-

                    참조.
                    πείσω | Verb: Fut Act Ind 1st Sing
                    πέπεισμαι | Verb: Perf Pass Ind 1st Sing
                    πεπεισμένοι | Verb: Perf Mid Part Nom Plur Masc
                    πεπεισμένος | Verb: Perf Pass Part Nom Sing Masc
                    πεπείσμεθα | Verb: Perf Pass Ind 1st. Plur
                    πέποιθα | Verb: 2nd Perfect, Act Ind 1st Sing
                    πεποίθαμεν | Verb: 2nd Perfect Act Ind 1st. Plur
                    πέποιθαν | Verb: Perf Act Ind 3rd Plur
                    πέποιθας | Verb: 2nd Perfect Act Ind 2nd Sing
                    πεποίθασιν | Verb: Perf Act Ind 3rd Plur
                    πεποίθατε | Verb: Perf Act Ind 2nd Plur
                    πέποιθεν | Verb: 2nd Perfect Act Ind 3rd Sing
                    πεποιθέναι | Verb: 2nd Perfect Act Infin
                    πεποιθέτω | Verb: Perf Act Imp 3rd Sing
                    πεποιθόσιν | Verb: Perf Act Part Dat Plur Masc
                    πεποιθότα | Verb: Perf Act Part Acc Sing Masc
                    πεποιθότας | Verb: 2nd Perfect Act Part Acc Plur Masc
                    πεποιθότες | Verb: 2nd Perfect Act Part Nom Plur Masc
                    πεποιθότων | Verb: Perf Act Part Gen Plur Masc
                    πεποιθυῖα | Verb: Perf Act Part Nom Sing Fem
                    πεποιθυῖαι | Verb: Perf Act Part Nom Plur Fem
                    πεποιθώς | Verb: 2nd Perfect Act Part Nom Sing Masc

                    YOUNG JIN LEE
                    키 마스터

                      πεποίθησιν은 명사 변화 여성 단수 대격인데 일반 1, 2변화에서는 찾을 수 없다.
                      명사 제 3변화로서 2nd 패턴, Petra. p. 85, 89.

                      다음 참조.
                      πεποίθησις
                      Parse: Noun: Nom Sing Fem
                      Meaning: confidence, trust; reliance
                      Forms:
                      πεποιθήσεως | Noun: Gen Sing Fem
                      πεποιθήσει | Noun: Dat Sing Fem
                      πεποίθησι | Noun: Acc Sing Fem
                      πεποίθησιν | Noun: Acc Sing Fem

                      답변: 요한복음의 μακάριοι #3192
                      YOUNG JIN LEE
                      키 마스터

                        요한복음에는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ί) 즉, ‘복 있는 자’가 한 사람 더 소개되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아는 자’다. 더 정확히는 ‘알고 행하는 자’라고 기록한다. (cf. 요 13:17)
                        따라서 ‘안다’는 ‘믿는다’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상충된다면 그가 잘 알지 못하거나, 혹은 믿지 않고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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