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지옥’이 묻는 5가지 질문 = 드라마 <지옥>이 개봉 당시 단숨에 순위 1위를 점했지만, 직접 관람해본 소감은 완성도나 스토리 면에서 한참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단 하루만에 세계 1위”, “CG 걸작 ‘지옥’ 전세계 빠졌다”, 이런 뉴스들은 아마도 전작 <오징어>의 세계적 명성에 기인한 착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옥>이 비록 <오징어>가 쌓아 놓은 명성을 죄다 까먹었음에도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사회를 향한 근본적인 질문은 참 가상하다고 생각되어 몇 자 요약해두려 한다.
어느 드라마든지 효과적인 메시지를 위해서는 플롯을 짜기 마련이다. <오징어>의 플롯이 ‘게임’이었다면 <지옥>에서의 플롯은 제목 그대로 ‘지옥’ 자체가 플롯이다. 하지만 <오징어>에서 게임이 게임이 아니었듯이 <지옥>에서의 지옥도 ‘지옥’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의 지옥은 지옥이라 쓰고 ‘모순’이라 읽어도 무방한 플롯이다. 이 드라마에서 말하는 <지옥>은 ‘모순’이라고 읽을 때 이 ‘지옥’의 진정한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셈이다.
이 글에서는 그 지옥에 관한 질문, 곧 현대 사회의 지옥이 갖는 모순성을 다섯 가지로 추렸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몇 단계 예시를 서로 잇는 방식으로 그 모순성을 정리했다. 경제는 경제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이들 질문에 관한 답을 숙고해보면 좋겠다.
첫째, 빈자 지옥
불교의 지옥 나라카에는 도둑이나 슈킹한 자들이 들어가는 화탕(끓는)지옥, 사기 친 자들이 들어가는 발설(혀뽑히는)지옥… 등 다양한 지옥이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지옥을 분류할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가난한 빈자들의 지옥이다. 누가 빈자의 지옥에 떨어지는가. 우선 개미처럼 일하지 않은 베짱이들이 겨울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 지옥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여름 내내 놀며 노래만 부른 베짱이들이 음반을 내더니 떼돈을 벌고, 열심히 일한 개미는 암에 걸려 죽기 때문이다. 이 모순에 답을 해야 한다. 이것이 드라마 <지옥>의 핵심 질의이다.
둘째, 병자 지옥
그렇다면 암 같은 질병은 누가 걸리는가? 평소에 위생 관리, 식단 관리 철저히 하고 규칙적인 생활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철저한 관리를 뚫는 질병이 있으니 그것은 유전의 법칙이다. 이 유전의 법칙이 어느 정도 (과연 누가 죽을 병에 걸리는가에 관한) 모순을 해소해주지만 사실 ‘유전’은 막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암이 없는데 내가 암이면 격세라고도 하고 격세로도 찾을 수 없으면 그 어떤 원인으로라도 인과의 고리를 먹이는 것이 불문의 관습이다. 하지만 병자 당사자에게 이 인과는 이론일 뿐이다. 대체 내가 왜 이 난치병에 걸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순에 답해야 한다.
셋째, 약자 지옥
약자는 매우 추상적 개념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일반화 강도가 과잉되고 세다. 종전에 약자라 함은 상기의 빈자나 병자를 포함한 노동 약자, 방임 여성/아동… 정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즉, 이 약자들이 왜 약자가 되었는 지에 대해 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 약자가 노동자로 포괄되어 연봉 7~8천여 만원에 이르는 계급도 약자로 통용되며, 방임 여성이 아닌 여성성 자체가 약자로 통칭 됨에 따라 지옥의 양상도 달라지게 되었다. 내가 대체 왜 연봉 7~8천 짜리 약자가 되었는지, 내가 대체 왜 엄마로 태어났는지, 이 모순에 답해야 하는 지옥의 풍경으로 그야말로 지옥이 환골탈태하기에 이른 것이다.
넷째, 사회주의 지옥
그리하여 이 드라마 <지옥>에서는 이 모순의 원인을 ‘죄’로 정의하고 속죄의 의식을 핵심 예배/예전으로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속죄의 의식이란 게 일종의 ‘자아비판’ 내지는 ‘인민재판’이다. 고중세에는 대개 집단 생활을 하는 종교 공동체에서 이런 의식을 공동체 유지를 위한 핵심 원리로 활용했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주의 국가 또는 그리로 넘어가려는 사회에서 보편화를 띤다. 선거나 의회 제도는 형식일 뿐 유일한 정치 수단은 인민재판식 여론 몰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유아인은 이 신흥종교를 창설했는데, 크나큰 모순에 빠지고 만다. 자신이 그만 지옥 갈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이 젊은 교주를 효시로 지옥의 인 맞은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죄인의 낙인으로 끝마치는 것이 두려워 은밀한 수단인 실종을 택한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 사회에 창궐하는 정치인(또는 공무원들)의 자살을 보는 듯 하다. 이른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겠다”며 혜성처럼 출몰하는 국내 인기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신흥 종교 같은 양상을 띠면서 그 주변에서는 정작 “자살이 강물처럼”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지옥의 모순이다.
다섯째, 기독교 지옥
드라마 <지옥>은 기독교가 아닌 이단 사교를 비판하는 듯 우회했지만, 사실은 기독교 특히 교회를 직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모순의 원인을 일소하는 교리가 바로 원죄인데, 이 원죄의 교리를 관념에 가둬버리고는 도통 원죄를 속죄하는 역량은 퇴화된 까닭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속죄시킬 권위와 능력 부재의 참상이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이다. 드라마 <지옥>에서 사교 집단이 순수한 어린 아기가 받은 지옥 고지에 꼼짝 못했듯이, 순수한 어린 아기가 지옥 가는 동안 순수하지 않은 목회자가 천국간다는 이 모순을 납득시킬 능력이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 바람에 ‘지옥 고지’는 단지 ‘재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기독교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