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 이전 사람들은 정말로 1,000살까지 살았는가?─ 이 글은 기독교인이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논하려는 목적에서 작성한 글이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을 무속과 미신이 과학을 대신하던 시대로 되돌려 보내 퇴행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과학 자신일 것이다. 더러는 그 과학에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가령,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창 7:7)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큰 배를 의미하는 배 선(船) 자는 배 주(舟)와 여덟(八)자 및 입구(口)자로 형성되어 있는데, 입구 자는 일반적으로 식구, 인구 할 때와 같이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덟 명이 한 배에 탄 모양을 큰 배라고 하였을까요?…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회 기록물
…라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 분들의 시도는 자신이 속한 전문 분야로 들어가서는 좀 더 어려운 전문 용어나 개념으로 채워질 뿐 이 시도를 지배하는 근본적 사고는 저 배 선(船) 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기초한다. 나는 과학도가 아니라서 과학 분야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맞는지 식별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성경 본문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非) 과학, 즉 미신 또는 무속적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인해 줄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노아의 대홍수 시대의 과학에 관해 잠깐 소개해드리겠다. 앞서 21세기 과학도의 배 선(船) 자에 담긴 과학과 어떻게 다른지 한 번 비교해보면 좋을 듯하다. 이 글은 ‘고대의 과학’, ‘성경 속의 과학’, ‘현대 기독교인의 과학’, 이렇게 3가지 범주에서 정리하였다.
고대의 과학
성경은 의외로 정확한 수(數)를 사용해서 연대기를 표시하기 때문에 그 역사적 신빙성을 더해주는 면이 있지만, 그 정확한 수의 표기는 상대적으로 역사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면에서도 기능한다. 노아의 홍수 직전에 나오는 창세기 5장의 족보는 그 대표적 예시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나이를 정확한 수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들이 향유한 수명이 대략 1000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정확한 수의 기재가 현대인의 과학을 자극하는 것이다.
과연 실제로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인간이 1000년을 살았을까?
과거가 현재와 모순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해석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다양한 해석학이 출몰하는 것이며, 현대 과학은 근대 해석학을 아비로 둔 자식들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이 미신으로 퇴행하거나 새로운 미신을 (과학의 이름으로) 출산하게 되는 많은 경우가 이런 과거의 사안에 대한 해석에 문외한인 경우에 그런 역주행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분명 인간을 1000살까지 살게 하실 수도 있고 또 그 수한을 단축하실 수도 있으며 아예 출생을 철회할 수도 있으시다. 이 주권은 우리가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적어도 창세기 5장의 최고령자 므두셀라(969세)를 위시하여 기재된 인간의 수명에는 모종의 해석학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대의 과학이 현대의 과학을 만족시킬 수는 없듯이 현대인의 해석은 고대인의 해석에 선행하지 못한다. 고대의 해석학을 알지 못하면 단숨에 미신과 무속으로 전락해버리는 원리이다.
창세기 5장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구체적인 수를 수록한다. 그런데 그 수를 이해할 때 현대인의 상수나 변수가 아니라 그 시대의 상/변수로 먼저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이 대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명을 기록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는 다 다루지 않겠지만 거기에 나오는 강의 이름이나 지명은 모두 우리가 현대적 지리에 맞추어 해명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예컨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비손’은 인더스 또는 아라비아와 이어지는 강이고, ‘뛰어오르다’는 뜻을 지닌 이 ‘비손’의 운율에 맞추어 ‘터져나온다’라는 뜻으로 명명된 ‘기혼’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어지는 강으로 은유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리적 역사 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수비(數祕)는 그 시대 그 지역의 수비의 쓰임새에 준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해석과 과학의 전제이다.
그 문명에서 산출된 구조물 내지는 비문학 자료 그리고 문학적 자료에 따르면 그 시대 통치자들이 구가했던 자신의 권력을 수비학적으로 서술한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현대 고고학으로는 2-3000년에 불과한 역사에 ‘0’ 한 두 개를 더 붙여서 20,000년~30,000년의 지배 기간으로 수록하기도 했다는 점은 당시의 이 수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해석의 과잉을 정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고대 에리두(Eridu) 왕국의 알룰림(Alulim) 왕의 사적은 그 대표적 예시일 것이다. 자기 왕조의 통치력을 약 28,000년으로 수록하고 있다. 그는 창세기의 배경 지대로 추정하는 수메르의 첫 번째 왕이기도 하다.
그들의 왕조가 실제로 2만 년이냐 3만 년이냐를 논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라, 그 시대의 수비 즉 그들이 자신의 과학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 이 고대 문헌을 대하는 바른 태도라는 사실, 이것이 현대 과학이다.
저 배 선(船) 자를 대하는 ‘과학적’ 태도와 한 번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성경 속의 과학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은 이후 930세까지 살았고, 아담의 아들 셋은 870세까지 살았으며, 셋의 아들 에노스는 905세까지, 에노스의 아들 게난은 910세까지, 게난의 아들 마할랄렐은 895세까지, 마할랄렐의 아들 야렛은 960세, 그리고 그의 손자인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아울러 이 최고령자인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777세를, 그리고 끝으로 그의 아들 노아는 홍수를 건너가서 950수를 산다.
므두셀라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이지만, 므두셀라의 아버지 에녹은 이 족보에서 가장 단명한 인물이다. 이 족보 상에서 ‘죽었다’(무트. מוּת)고 표현한 대부분의 인물과 달리 유독 ‘데려갔다’고 기재된 에녹의 종말을 신약에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이라 주석하는데, 에녹이 65세에 낳은 자기 아들의 이름에 마치 ‘무트’(죽음)가 연상되는 음가를 집어 넣어준 것은 결코 공교로운 일이 아니다. 그 바람에 ‘man of the dart’(화살 인간)라는 뜻의 이름 므두셀라는 마치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또는 죽음을 보내버리는) 탄도처럼 연상되기 때문이다.
지구 종말의 조짐은 이미 에녹에서부터 인식이 되었던 셈이다.
아담의 8대손 므두셀라가 죽은 해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와 들어맞는다. 이는 홍수가 들이닥친 해에 므두셀라의 생을 마쳤다는 사실보다는 므두셀라 자신이 한 세대의 마지막 종결이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한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화살 인간’(man of the dart)이란 뜻을 가진 므두셀라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므두셀라가 왜 하필 969세까지 살았을까? 라는 의문은 그의 아들 라멕이 왜 하필이면 777세까지밖에 못 살았을까? 라는 의문에 우선하는데, 이는 시조 아담으로부터 므두셀라 자신이 7번째 후손인 반면, 살인 병기 제조공 두발가인은 최초의 살인자인 조상 카인으로부터 6번째 후손이었다는 수비학 속에서 므두셀라의 나이 969수는 불완전 수 ‘9’ 사이에서 종말의 수 ‘6’을 견인한다는 사실이다. 그야 말로 므두셀라의 삶은 문자 그대로 므.투.셀.라.(מְתוּשֶׁלַח) 곧,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man of the dart”(인간 탄도)였던 셈이다. 이것이 이 시대 과학이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 5장 족보에 나타난 이들 30개 나이를 장식하는 숫자의 끝은 모두 0, 2, 5, 7 그리고 9로 끝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진수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는 잘 안 들어오지만 이들 변수들은 당대 신성 수비학 중 60과 7의 조합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0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비학의 진수이다. 우리 시대의 60초 60분의 시간 개념에도 이 60진수가 남아 있다. 7은 성경을 포함한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신성 숫자임은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안식일도 제 7일이었으며, 12제자를 대체한 사도행전의 집사들 인수도 7명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므두셀라가 777세에 죽은 아들을 187세에 낳았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187세는 60을 3회전하고 7년 째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60개월을 3회 돌고서 남은 7수는 앞서 제시한 0, 2, 5, 7, 9 중의 하나이다. 또한 아담이 아들 셋을 낳을 때는 130세였다. 이 역시 60을 4회전 한 수비인데, 60년 x 2 + 60개월 x 2로 계산하면 0을 남긴다. 0은 앞서 제시한 0, 2, 5, 7, 9 중의 하나이다. 이런 식의 조합을 이 족보에 적용하면 그들이 1000살 가까이 산 목적을 밝힐 수 있다. 이 수비에 들지 않는 수는 앞서 전개한 므두셀라, 라멕, 노아 Vs. 카인, 두발카인에 얽힌 사연 정도를 그 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이 당시의 과학이다.
현대의 과학
따라서 과학이란 어떤 증명이란 본성(本性)을 이용해 무엇을(또는 누구를) 위해 종사하는지가 그 본령(本令)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수비학은 왕조를 선전하기 위해 종사했고, 성경 속의 수비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하늘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목적을 밝히는 것이 성경이지 과학을 밝히는 것이 성경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현대 과학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다는 선량한 취지에서 그랬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창조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과학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오용함으로써 그만 미신으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심각한 과학도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
2년 전에 우리 사회를 강타한 코로나 19 감염증이 여전히 창궐하고 있는 가운데, 적지 않은 과학도들이 자신이 평생을 갈고 닦은 과학을 권력이 주도하는 미개한 방역 정책의 증인들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빽빽한 전철을 타고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린 다음,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대형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나서 그 다음 날 코로나 19 감염증에 걸렸을 때, 유독 교회에 가서 코로나 19에 감염된 것으로 간주하는 이상한 수비학에 동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테면 코로나 19 감염증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을 이미 두 차례나 맞았는데도 3차 4차를 또 맞아야 한다면서 ‘백신’으로서 효능의 경계를 허무는 이상한 수비학에도 부역함으로써 자신들의 과학을 고대 수비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처럼 본성과 본령을 모두 상실한 과학은 100세를 살더라도 1000년의 의미로 살았던 창조 세계에 반하여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1000년을 살라고 하는 재앙에 종사하는 과학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것이 노아의 시대 1000년 수명이 갖는 목적과 의미이다. 모두가 물에 휩쓸려 죽은 뒤에 인간의 수명은 10분의 1로 감소하기에 이른다.
기가 막히게 통쾌한 예시를 들어주시니 이해가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