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절의 영감이란 무엇인가
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무엇을 따르는가 […]
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무엇을 따르는가 […]
헬렌 켈러는 사실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국에선 거의 왕따 같은 삶으로 여생을 마쳤다. 불편한 인권을 들추고 다녔기 때문에 우파들이 더이상 그녀의 장애를 칭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촘스키는 깨어있는 좌파의 영예도 누리고 있지만, 생활은 강남을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 아마 주식도 한다는 것같다. 사유재산을 부인하기도 한 그가 말이다. 헬렌 켈러 같은 여성은 마땅히 언제나 우리의
신약성서에도 정치적 당파는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사두카이오스, 파리사이오스, 헤로디아노이, 그리고 끝으로 이스카리오테스 즉 <열심당>으로 알려진 시카리만이 기록에 남아 존재한다. 각 당파는 기본적으로 종교노선을 갖지만 헤게모니 층이 귀족인가 사제인지 교사인지 일반 행동파 시민인지에 따라 나뉘는 경향 또한 보인다. 요세푸스는 이들 모두에게 도래되는 종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백성들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곡식 한 그릇에 팔았다.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세겜, 헤브론과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브라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장막을 친 곳이고 헤브론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다. 세겜과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편입돼 접근이 통제되고 있어 브엘세바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만민의 아버지”가 된다는 위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몇 가지 고질적 문제를
이글은 성서일과로 구성한 설교의 요지입니다.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 마다 다 다릅니다. 몇 가지가 다르지만 향유를 머리가 아닌 발에 붓는 것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뿐 입니다.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보다 이 발에 붓는 장면에 더 주력합니다. 이 글과 설교 음원은 누가복음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프롤로그: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들
향유를 왜 머리가 아닌 발에 부었는가? (눅 7:36-8:3) 더 보기 »
프롤로그 | 아합의 아버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면서 남쪽은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북쪽에서 가져다 썼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대로 남 유다는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다윗의 이상을 이어 받지 못한 것으로 성서는 기록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그들에게는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계속되었다.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설립한 이래 열 아홉 명의 왕이 바뀌는
우리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원리에 대하여 더 보기 »
프롤로그 | NCD Vs. Finding Organic Church. 과거 NCD라는게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과거만 못하기에.) 크리스티안 슈바르츠가 만든 이말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자연적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이란 이름으로 들여왔다. 마이너스 성장하는 당시 개신교 환경 속에서도 신흥 메가쳐취의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그 열풍이 지방 중소형 교회에 한창 일 무렵 프랭크 바이올라라는 사람이 쓴 책 하나가 Finding Organic Church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셀(목장) 교회, 1인 체제를 위한 분할인가? 집합을 위한 분할인가? 더 보기 »
프롤로그 | 소망 Vs. 희망. 소망(所望)과 희망(希望)은 다른 말일까? 국내 개신교에서는 희망이라는 말 보다는 소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공동체에서의 사용 빈도수도 그렇지만 성서번역에도 그러하다. 신약성서 기준으로 개역한글에서 48회 정도가 소망으로 번역되는 동안 희망은 단 한 번 쓰였고, 표준새번역에서는 소망이 45회 희망이 13회 채택되었다. 그리고 새번역의 소망은 45회이고 희망은 14회다. 공동번역만이 59회 모두 희망이라고 번역했고 소망은 단 한
프롤로그 | 언어의 붕괴. “어떤 민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사용한 언어를 재구성해 그들의 풍습, 제도, 계통, 인종 등을 밝힐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의 공통성으로부터 혈족 관계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즉 어족이 인류학적 종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르만 민족을 가정해보자. 그들 특색은 뚜렷하다. 금발, 긴 두골, 큰 키… 스칸디나비아형이 가장 완벽한 그들 형태다.
기독교의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더 보기 »
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이 글은 죽음과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미로와 같은 세상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 지에 관한 설교를 성서일과에 맞추어 소고 형식으로 요약한 글입니다. 프롤로그: 미로와 사이렌 미로(迷路)란 출발 지점에서 도착 지점까지 아주 복잡하게 이루어진 길을 말합니다. 방향(성)을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전혀 출구로 향하는 (갈림)길 없이 닫힌 길들의 연결을 일컫는 말로 미궁(迷宮)이라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