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폭로
프롤로그 | Man at Work (1883)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한 화가로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경이로울 정도의 농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당시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테오. 내가 그들 가운데서 뭐든 형체가 될 만한 그 뭔가를 그린 풍경을 볼 것 같으면, 난 분명 풍경 화가는 아니야…” 이 그림만 보더라도, […]
프롤로그 | Man at Work (1883)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한 화가로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경이로울 정도의 농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당시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테오. 내가 그들 가운데서 뭐든 형체가 될 만한 그 뭔가를 그린 풍경을 볼 것 같으면, 난 분명 풍경 화가는 아니야…” 이 그림만 보더라도, […]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분간’이라는 말은 관찰하고 깨닫는다는 뜻이 있지만(도키마조)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석>하고 어느 정도의 <해석능력>을 가졌는가? (1) 가령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라는 말이 “폴루메로스 카이 폴루트로포스 팔라이 호 테오스…토이스 파트라신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라는 희랍어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어디든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교회다.” 도발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이 같은 외침이 한국 교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인가. 27일 일요일 오후 서울 신사동 R호텔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스피커를 통해 무대에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나 랩의 굉음이 아닌 찬양 소리와 ‘아멘’이다. 서울 강남권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이 나이트클럽에서 찬양 예배가 시작된 지 벌써 한
‘제사’를 문맥 속에 놓고서 설명하는 이 유명한 믿음의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히브리서의 믿음을 토대로 부정적 예시의 제사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다. (1) 욥의 제사: 유비무환, 확실히
다음은 익명(Anonymous)에 대한 문자적 유래 입니다. Anonymous(어나니머스)는 onym이라는 말에 a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된 말이다. onym은 name의 어근이다. onyma은 onoma와 더불어 희랍어로서 onym에서 ‘o’가 탈락되고 음가를 통해 name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ous는 ‘있는’(full)이라는 접미이고 a(n)는 부정(not)이다. 이렇게 해서 이름(onym/name)이 없다(an/not)는 뜻 즉, ‘이름을 숨긴’을 뜻하는 ‘익명의’라는 어휘가 태어나 ‘가명의’라는 뜻은 물론 ‘무명의’(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특징이 없는’(이름을
일전에 소개했던(지난 2/25과 2012/07/02 )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GO는 ‘자부심/자존감’이라는 뜻에서 ‘자아’라는 심리적 의미까지 폭넓게 쓰입니다. ECO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집’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실 ‘이기주의’(EGO)를 지양하고 조화로운 환경(ECO)을 지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서는 여전히 자아를 통해서 환경에 이르는 전통을 진리로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파워 블로거가 날이면 날마다 ‘신사참배’와 ‘독재’ 청산만 외쳐대는
이번 주 성서일과(lectionary)를 받아들고는 내가 혐오하던 이씨(氏) 아저씨를 떠올렸다. 바울이 제사에 쓰는 술처럼 (혹은 피) 주님을 위해 자신을 “붓는다”고 표현했던 말년의 고백, 베드로가 말세에는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영을 부어 주신다며 인용했던 요엘의 예언, 그리고 옆에 서있던 바리새인과는 달리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 쥐어뜯던 세리 이야기(딤후 4:6-8, 16-18; 욜 2:23-32; 시 65; 눅 18:9-14.), 이들을 읽으며
프롤로그 | 여름 실과 한 광주리. 다음은 아모스의 한 대목입니다. 8:1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8:2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8:3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게하시는 구약성서 열왕기하에서 14번 정도 언급되는 엘리사의 사환 이름이다. 이 글은 그렇게 큰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닌 게하시가 신약성서에서 어떻게 환기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본 설교 요지문이다. 프롤로그: 호모보누스와 프란치스코 1197년 경에 활동하던 호모보누스라는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번창시켜 사업에서 버는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우리나라의 나병(한센병) 나병은 구약성서에서 천형으로 묘사되거나 문둥이라는 표현으로 전라/경상도 욕설일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돼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강제 수용해 그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당시 병원장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베푼다고 언론에서는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강제노역, 여성과 남성의 분리, 불임수술 등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명 물방이라는 독방에 가두기도 했는데 방 구조가 문턱이 높고 고의로 물을 채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