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moon

Text에 집중할 수 있는 예배. | the righteousness of God | Since April 8, 2012.

낸시랭의 신학펀치

낸시랭의 신학펀치. 이걸 보다 뜬금없이 “작지만 큰 교회”가 떠올랐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어떤 외부강사가 와서 유머라고 한다는 소리가 “<작지만 큰 교회>라는 간판을 단 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 ‘작’에서 ‘ㄱ’이 떨어져버렸다”며 자기 혼자 웃다가 간 에피소드다. ‘ㄱ’자가 떨어져나간 “작지만 큰 교회” 이걸 유머라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설교자들을 보니 원래 웃기는 사람이 있고, 웃기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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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49:1-3 이처럼 한껏 용기를 선포 받고도 이스라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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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우리 목사님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우리 목사님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이 시대 목사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념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일만큼 부담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 교회 신도 중 절반은 잃을 테니. 일종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나의 경우는 이념성애자에 가까운 목사들이 성령 세례보다도 자신이 젊었을 때 받았던 이념 세례를 더 추앙하면서도 정작 자기 목회에서는 자본적 양상에 철저한 것을 눈뜨고 보기 힘들어 하는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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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remnant) 인플레이션

신구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 주제들이 여럿 있지만 남은 자(remnant)라는 개념도 그 중 하나다. Kjv 기준으로 약 92회가 사용된다. 다음은 그 주제가 도출되는 주요 모티프들이다. (1) 우선 노아는 홍수에서 남은 자였고(창 6:5-8; 7:1, 23), 롯은 소돔 멸망에서 남은 자였으며(창 18:17-33, 19:1-29), 모세는 남아(男兒) 살해 정책에서 남은 자였다(출 2:1).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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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a time)가 있다.

열네 쌍의 ‘때’. 매년 성서일과 상에서 송구영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도서 3장의 핵심 메시지는 ‘때’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열네 쌍의 때(tim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열네 쌍의 ‘때’가 무엇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적인 의식과 체험을 가미해 서술식으로 나열해보고자 합니다. 가장 첫 번째 ‘때’인 ⑴ ‘날 때’와 ‘죽을 때’를 처음으로 안 것은 나이 8세 때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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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임마누엘>이지만 임마누엘이 지닌 맥락을 정확히 알고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것이 권위 있는 한 예언자 <입>을 통해 계시된 줄은 알지만, 악한 어떤 왕의 <귀>를 통해 계시된 사실도 다 배제된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릴 적부터 슬픈 날과 맞붙은 기쁜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3일 전인 22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의 설레임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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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화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는 본문을 설교하려다 보니 내 자신이 교회를 ‘사막화’시킨 부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하여 나는 한국교회의 사막화에 일조한 일면이 있다. 전통교회를 비판하면서 1-2세대 부흥사들은 천막집회 등지에서 신유와 이적 등 강력한 은사를 통해 먹고 살길 막막했던 민족을 위로하고 일깨워 그들의 영육이 성장할 수 있게 했지만, 말년에 그들은 자기교회를 구축하고 축재하거나 형편없는 자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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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11장,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는 누구인가?

  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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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의 본말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 매장되었다며 찾아 헤매는 노력은 실로 허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방주가 지닌 ‘본말’ 보다는 그것을 채증해보이겠다는 ‘과학’에 대한 맹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맹신은 대개 방주를 축조해낸 한 ‘가정의 이야기’라는 본말 대신에 그 방주의 크기에 더 관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발굴한 방주가 생각 보다 작으면 어쩌려고? 아니 이미 발견했지만 생각보다 작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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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갚음을 끊는 길

프롤로그 |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1세기경 로마의 관리 중에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약 4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 당시의 로마가 시내 관리를 위해 약 700명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이다. 그런데 그 집에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침실에서 일하는 노예 중 한 명이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당시는 네로 치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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