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moon

Text에 집중할 수 있는 예배. | the righteousness of God | Since April 8, 2012.

노아(2014)가 발견한 은혜

지난주에 작성한 노아(2014) 리뷰의 후속편이다. 이 글을 추가로 남기려는 것은 이 영화를 대하는 기독교인의 반응을 통해 그들이 지닌 <은혜>의 편벽된 이해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확신에서다. 즉 그 나머지 반쪽 이해가 어떤 것인지 남기기 위함이다. 영화 노아(2014)는 이스라엘의 단군 할아버지 격인 ‘아브라함’이 안고 있던 역사적 쟁점을 알지 못하면 그 본질을 소화하기 어려운 플롯으로 구성되었다. 아담과 노아는 어느 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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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2014)를 기독교인이 감상하는 법

    노아(2014)는 비 기독교인이 관람하기에는 상당한 성서 지식을 전제한 영화이고,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본문에 대한 고민과 체험이 없다면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성서에 집중한 수작이다. 특히, 평소에 노아를 사랑의 교회 장로님이나 순복음 교회 장로님 정도로 연상했던 기독교인에게는 꽤나 실망을 안겨줬을 법하다. 이 노아는 러셀 크로우가 그동안 배역 맡아온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 발장의 ‘자베르’와 거의 같은 타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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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졸업식

사실, 지난주 막내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가 ‘모 이런 쓰레기 같은 졸업식이 다 있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완전 잡쳐서 돌아왔습니다. 10여분이나 늦게 시작한 졸업식, 아마도 중요한 내빈이 늦어 그런 눈치였는데, 가뜩이나 늦게 시작한 졸업식 초반부를 무려 20여분이나 시상으로 채웠습니다. 시의원 상, 국회의원 상.., 시상식은 상 받는 애들보다는 상을 주는 저 사람들을 위한 시간임이 역력-. 그러더니 운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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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리바 샘’에 대한 목회자의 오남용

므리바 샘. 어떤 목회자가 만일 <므리바> 사건을 ‘모세’같은 자신을 향해 불순종하는 장로들을 길들이려는 예화로 썼다면 그건 넌센스일 수 있다. 므리바 사건은 도리어 모세가 징계 받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 사건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므리바 사건을 인용할 때 이처럼 혼동하는 것은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장로들의 불평이 부각되지만, 민수기 본문에서는 모세와 아론의 불평에 더 주목하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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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력하여 선이라는 말은 상부상조가 아닙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말은 상부상조, 좋은 게 좋은 거 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놓인 상황은 “내가 이것 밖에 안돼서” 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선의, 최적의 환경으로 주신 줄 반드시 믿으셔야 합니다. 시간이 정복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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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미터 간격으로 교회

구정 명절, 처가에 방문해 뭘 좀 살 게 있어 동네에 나갔다가… 저 간판들 중 특이한 점은? 교회가 10미터 간격으로 있습니다. 반석교회, 예수평강교회, 두드림교회… 수효가 많아진 관계로 전혀 신비롭지도, 당위적이지도 않아 보이는 교회 숲. 바울이 누비고 다니던 헬라 세계는 오늘날 카페처럼 많은 게 신전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카페보다 많은 게 교회 입니다. 기독교 인구는 급격히 줄어드는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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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우리가 믿는 믿음의 기원은 하나 같이 관계 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이라는) 어느 한 작은 종족에서 발생한 종교를 믿게 된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느닷없이 뚝 떨어진 그 무엇을 믿게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과 믿음의 기원은 어디까지나 관계 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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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의 신학펀치

낸시랭의 신학펀치. 이걸 보다 뜬금없이 “작지만 큰 교회”가 떠올랐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어떤 외부강사가 와서 유머라고 한다는 소리가 “<작지만 큰 교회>라는 간판을 단 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 ‘작’에서 ‘ㄱ’이 떨어져버렸다”며 자기 혼자 웃다가 간 에피소드다. ‘ㄱ’자가 떨어져나간 “작지만 큰 교회” 이걸 유머라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설교자들을 보니 원래 웃기는 사람이 있고, 웃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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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49:1-3 이처럼 한껏 용기를 선포 받고도 이스라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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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우리 목사님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우리 목사님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이 시대 목사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념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일만큼 부담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 교회 신도 중 절반은 잃을 테니. 일종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나의 경우는 이념성애자에 가까운 목사들이 성령 세례보다도 자신이 젊었을 때 받았던 이념 세례를 더 추앙하면서도 정작 자기 목회에서는 자본적 양상에 철저한 것을 눈뜨고 보기 힘들어 하는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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