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문서 예언자가 되십시오
어제 내가 이번 학기에 맡았던 클래스들 가운데 구약학을 듣던 한 여성 전도사께서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 해서 다녀왔다. 그녀에게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은사는 고결하게 간직하되 억제하고 결코 쓰지 마시라-고 권면했다. 그러고는 다음 두 가지 자료를 건네주었다. 하나는 내가 지난 해 7월경에 작성한 주석 문건 하나였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방언과 예언 […]
어제 내가 이번 학기에 맡았던 클래스들 가운데 구약학을 듣던 한 여성 전도사께서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 해서 다녀왔다. 그녀에게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은사는 고결하게 간직하되 억제하고 결코 쓰지 마시라-고 권면했다. 그러고는 다음 두 가지 자료를 건네주었다. 하나는 내가 지난 해 7월경에 작성한 주석 문건 하나였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방언과 예언 […]
막내가 불현듯 “왜 사는지를 모르겠어요. 다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서 가장 명랑한 소녀도 저런 말을 하는가? 해서이다. 걱정보다는 ‘이제 마음의 조직이 시작된건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큰 녀석도 거쳤거니와 이제 이 꼬맹이도 시작인가 하는 생각에 스핑크스 앞에 선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모든 인간의 길. Musée du Louvre, Paris, Attributed to the Menelaus
우리 사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경계는 무슨…이미 늦었나? ‘역사 수정주의’다. 여기서 말하는 수정주의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라든지, “십일조 영웅 록펠러의 또 다른 실체” 라든지, “링컨의 남북전쟁은 노예해방 아닌 노동시장 탈환” 등과 같이 과거에 배운 정명제(thesis)에 대한 반제(anti-thesis)를 이르는 말이다. 이 같은 수정주의 관점은 일찍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죄의식이 빈약했던 유럽
세월호의 좌절과 슬픔 그리고 격분을 한 데 모아 증폭시킨 데에는 단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장외 언론들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손석희 앵커의 감동 저널리즘은 그 중의 백미일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산 게 무엇이었는지 그가 일깨워주는 동안.., 사실 난 두 개의 오랜 장면을 떠올렸다. 하나는 과거 한 대형교회에서 설교 들을 때의 일이다. 그 교회는 워낙
계약신학, 언약신학─계약은 왜 강제적인가? 종말, 영생, 은사, 축복, 하나님 나라… 다양한 기독교 신앙 주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이라는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보다도 중요하다. 약속과 분리된 예수는 다른 예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자꾸만 잊는 이유 신약·구약, 약속을 책으로 엮어 들고 다니는 우리가 이 약속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이유는 성서 번역 과정에서
가인은 아벨이 때려죽이는데 가만히 있었고, 에녹은 하나님이 옮기실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노아는 방주를 준비해 비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가만히 있었고, 사라는 단산했지만 아이 볼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데도 가만히 있었고, 이삭은 우물을 빼앗기는데도 가만히 있었고, 야곱은 삼촌이 속여도 가만히 있었고,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때 자기를
한 왕에게 세 딸이 있었다. 그 중 막내가 가장 아름다웠다. 어릴 때부터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던 사람들은 소녀가 다 커서 성년의 공주가 되자 칭송에 지나쳐 숭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화가 난 미(美)의 여신은 자기 아들에게 명하여,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추한 생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라고 시켰다. 아들은 다름 아닌 큐피드, 엄마는 아프로디테. 화살을 들고 그녀에게
※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모두가 그랬듯이 세월호 사고의 충격 여파로 다분히 감정에 젖은 가운데서 구원론에 관한 회의적 시각을 담았던 글이다. 그러나 3년이 흐르면서 상처 받은 사회의 다양한 격변 속에서, 진리란 왜 불변해야 하는지 깊은 반성으로 수정을 가하였다. 세월호 침몰로 인한 국민적 슬픔이 사흘도 안 되어 양분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안병무의 신학을 내 개인적으론 거부하지만 이 사순의 종말에.., 이 민족의 그칠줄 모르는 죄성과 극악 무도한 심장 밑에 깔려 나뒹구는 저 아이들을 이렇게 불러야만 되겠다… 보라 이 사람들을(엑세 호미네스). 오주여 우리가 잘못했나이다… * 요 19:4. * 2014/4/18/ 금, 사순절 서른아홉째날. ** 크로스로 기고문: 보라! 이 아이들을!
하나님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어왔다. “Yes,” “No,” “Wait.” 그러면서도 언제나 응답은 사실상 “기다림”(Wait)이라는 합의 결론으로 종용해오는 바람에 응답 구하는 당사자는 그 기다림을 볼모로 시간과 물질을 착취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가운데 1:16-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대목에서 그 세 가지 응답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진다. “<믿음에>라 함은 하나님 그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