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앵커의 저널리즘
세월호의 좌절과 슬픔 그리고 격분을 한 데 모아 증폭시킨 데에는 단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장외 언론들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손석희 앵커의 감동 저널리즘은 그 중의 백미일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산 게 무엇이었는지 그가 일깨워주는 동안.., 사실 난 두 개의 오랜 장면을 떠올렸다. 하나는 과거 한 대형교회에서 설교 들을 때의 일이다. 그 교회는 워낙 […]
세월호의 좌절과 슬픔 그리고 격분을 한 데 모아 증폭시킨 데에는 단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장외 언론들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손석희 앵커의 감동 저널리즘은 그 중의 백미일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산 게 무엇이었는지 그가 일깨워주는 동안.., 사실 난 두 개의 오랜 장면을 떠올렸다. 하나는 과거 한 대형교회에서 설교 들을 때의 일이다. 그 교회는 워낙 […]
계약신학, 언약신학─계약은 왜 강제적인가? 종말, 영생, 은사, 축복, 하나님 나라… 다양한 기독교 신앙 주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이라는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보다도 중요하다. 약속과 분리된 예수는 다른 예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자꾸만 잊는 이유 신약·구약, 약속을 책으로 엮어 들고 다니는 우리가 이 약속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이유는 성서 번역 과정에서
가인은 아벨이 때려죽이는데 가만히 있었고, 에녹은 하나님이 옮기실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노아는 방주를 준비해 비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가만히 있었고, 사라는 단산했지만 아이 볼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데도 가만히 있었고, 이삭은 우물을 빼앗기는데도 가만히 있었고, 야곱은 삼촌이 속여도 가만히 있었고,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때 자기를
한 왕에게 세 딸이 있었다. 그 중 막내가 가장 아름다웠다. 어릴 때부터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던 사람들은 소녀가 다 커서 성년의 공주가 되자 칭송에 지나쳐 숭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화가 난 미(美)의 여신은 자기 아들에게 명하여,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추한 생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라고 시켰다. 아들은 다름 아닌 큐피드, 엄마는 아프로디테. 화살을 들고 그녀에게
※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모두가 그랬듯이 세월호 사고의 충격 여파로 다분히 감정에 젖은 가운데서 구원론에 관한 회의적 시각을 담았던 글이다. 그러나 3년이 흐르면서 상처 받은 사회의 다양한 격변 속에서, 진리란 왜 불변해야 하는지 깊은 반성으로 수정을 가하였다. 세월호 침몰로 인한 국민적 슬픔이 사흘도 안 되어 양분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안병무의 신학을 내 개인적으론 거부하지만 이 사순의 종말에.., 이 민족의 그칠줄 모르는 죄성과 극악 무도한 심장 밑에 깔려 나뒹구는 저 아이들을 이렇게 불러야만 되겠다… 보라 이 사람들을(엑세 호미네스). 오주여 우리가 잘못했나이다… * 요 19:4. * 2014/4/18/ 금, 사순절 서른아홉째날. ** 크로스로 기고문: 보라! 이 아이들을!
하나님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어왔다. “Yes,” “No,” “Wait.” 그러면서도 언제나 응답은 사실상 “기다림”(Wait)이라는 합의 결론으로 종용해오는 바람에 응답 구하는 당사자는 그 기다림을 볼모로 시간과 물질을 착취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가운데 1:16-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대목에서 그 세 가지 응답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진다. “<믿음에>라 함은 하나님 그분의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나니”(롬 1:18) 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본질적 속성을 표현한 말이지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은 특히 부활을 중심에 놓았을 때 이쪽 편, 우리를 나타내는 특질이다.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불.의.하.다. 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말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다고
지난주 <선오브갓>(2014)에 관한 기고를 하나 냈다. 어떤 웹진의 요청에서였는데 영화 실제 내용보다는 ‘플롯’이란 개념에 대해서만 좀 언급했다. 기고문: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837 종려주일. 이 ‘호산나’ 플롯의 핵심은 <배신>이다. 배신 해본 적 있는가? 아니면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가? 대부분 배신을 당했던 것만 말하지 자기가 배신한 건 잘 말하지 않는다. 특히, 누구보다도 배신의 방점을 찍었던 인물이 자기를 배신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보인 일곱 표적[*] 가운데 종결편이다. 흔히 이후에 일어날 (진짜) 부활의 예표이거나 그림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표적’으로 – 요나의 표적을 빗대면서 –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목하는 것과는 달리, ‘나사로의 부활’을 명백한 최종 표적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것이다.) 게다가,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