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신의 EGO를 좀 먹는 영

일전에 소개했던(지난 2/25과 2012/07/02 )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GO는 ‘자부심/자존감’이라는 뜻에서 ‘자아’라는 심리적 의미까지 폭넓게 쓰입니다. ECO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집’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실 ‘이기주의’(EGO)를 지양하고 조화로운 환경(ECO)을 지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서는 여전히 자아를 통해서 환경에 이르는 전통을 진리로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파워 블로거가 날이면 날마다 ‘신사참배’와 ‘독재’ 청산만 외쳐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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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처럼(전제) 내가 부어지다

이번 주 성서일과(lectionary)를 받아들고는 내가 혐오하던 이씨(氏) 아저씨를 떠올렸다. 바울이 제사에 쓰는 술처럼 (혹은 피) 주님을 위해 자신을 “붓는다”고 표현했던 말년의 고백, 베드로가 말세에는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영을 부어 주신다며 인용했던 요엘의 예언, 그리고 옆에 서있던 바리새인과는 달리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 쥐어뜯던 세리 이야기(딤후 4:6-8, 16-18; 욜 2:23-32; 시 65; 눅 18:9-14.), 이들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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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의 답답함 Vs. 마리아의 태만함

프롤로그 | 여름 실과 한 광주리. 다음은 아모스의 한 대목입니다. 8:1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8:2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8:3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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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시

게하시는 구약성서 열왕기하에서 14번 정도 언급되는 엘리사의 사환 이름이다. 이 글은 그렇게 큰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닌 게하시가 신약성서에서 어떻게 환기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본 설교 요지문이다. 프롤로그: 호모보누스와 프란치스코 1197년 경에 활동하던 호모보누스라는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번창시켜 사업에서 버는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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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 Vs. 사마리아 나병환자

우리나라의 나병(한센병) 나병은 구약성서에서 천형으로 묘사되거나 문둥이라는 표현으로 전라/경상도 욕설일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돼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강제 수용해 그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당시 병원장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베푼다고 언론에서는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강제노역, 여성과 남성의 분리, 불임수술 등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명 물방이라는 독방에 가두기도 했는데 방 구조가 문턱이 높고 고의로 물을 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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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절의 영감이란 무엇인가

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무엇을 따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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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밀려날 데가 없는 분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세겜, 헤브론과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브라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장막을 친 곳이고 헤브론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다. 세겜과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편입돼 접근이 통제되고 있어 브엘세바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만민의 아버지”가 된다는 위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몇 가지 고질적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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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를 왜 머리가 아닌 발에 부었는가? (눅 7:36-8:3)

이글은 성서일과로 구성한 설교의 요지입니다.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 마다 다 다릅니다. 몇 가지가 다르지만 향유를 머리가 아닌 발에 붓는 것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뿐 입니다.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보다 이 발에 붓는 장면에 더 주력합니다. 이 글과 설교 음원은 누가복음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프롤로그: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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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원리에 대하여

프롤로그 | 아합의 아버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면서 남쪽은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북쪽에서 가져다 썼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대로 남 유다는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다윗의 이상을 이어 받지 못한 것으로 성서는 기록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그들에게는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계속되었다.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설립한 이래 열 아홉 명의 왕이 바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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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목장) 교회, 1인 체제를 위한 분할인가? 집합을 위한 분할인가?

프롤로그 | NCD Vs. Finding Organic Church. 과거 NCD라는게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과거만 못하기에.) 크리스티안 슈바르츠가 만든 이말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자연적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이란 이름으로 들여왔다. 마이너스 성장하는 당시 개신교 환경 속에서도 신흥 메가쳐취의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그 열풍이 지방 중소형 교회에 한창 일 무렵 프랭크 바이올라라는 사람이 쓴 책 하나가 Finding Organic Church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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