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moon

Text에 집중할 수 있는 예배. | the righteousness of God | Since April 8, 2012.

지구평평설

지구가 평평하다는 걸 신앙고백처럼 여기는 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을 근래에 알게 되었다. 뭔소리들인가 했더니… 이런 것을 신앙 주제로 신봉하고 전파하는 분은 과학 논쟁 이전에 심리상담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 신앙과 아무 관련없는 초등학문적 불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불신이 미신화 된 전형이다. (맹신만 미신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물론 지구 평평설이 전혀 근거 없는 낭설만은 아니다. 오늘날 정설로 자리잡은 지동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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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는 다른 것인가

가령, 이제…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ㅡ라고 하였을 때 이는 성화(sanctification)의 본문인가? 칭의(Justification)의 본문인가?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 성서적 근거는? (강요[Institutio] 말고…로마서 중심) 그러면 성화(ἁγιάζω)는 완성된 것인가? 미완성된 것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단일한 것이다. 다음의 개요를 유념할 것이다. 1. 기독교인의 구원은 ‘천당(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속성의 변화이다. 2. 적어도 로마서에 따르면 인간은 단 한 번(ἐφάπαξ)의 변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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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이란 무엇인가

예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나치게 ‘예정’에 민감한 이유는 예정을 일종의 ‘점지하는’(산신령과 부처님이 정해줬다) 행위로 오해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가령,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ㅡ” ㅡ라 하였을 때, 우리를 장악하는 것은 예정만이 아닙니다. 뜻, 계획, 예정. 이 셋이 우리를 장악합니다. 여기에 서열을 정하면, 2) 뜻, 1)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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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사이비 복음서

목차 I. 제4복음서에 대한 도발(挑發) II. 영지주의에 대한 도착(倒着) III. 마르시온에 대한 애착(愛着) IV. 도올의 사이비 복음, 큐(Q)복음서 이 글은 도올 김용옥 교수가 그동안 사회에 유포해온 사이비 기독교의 폐해를 통감하고, 그 중에서도 그의 복음서 이해에 나타난 이단성을 알리고자 구성한 글이다. 텍스트에 관한 이단성이 그의 모든 사이비성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지금부터 약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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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을 탄핵하면 안 되는 신학적인 이유

고대 유대인에게는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 같은 최고 법정 제도가 있었다.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결정 기구이다. 산헤드린의 기원을 어느 때로 산정하느냐 의견이 분분하다. 바벨론 포로 귀한 시대에 에스라-느헤미야가 설치한 훈시 기구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고(스 10:8; 느 5:7), 아예 모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민·형사 소송을 홀로 처리할 수 없었던 모세가 70인 장로를 뽑아 분담했던 시절을 기원으로 잡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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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란(亂)이 될뻔한 종교개혁

개혁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도로의 복귀 또는 제도로서의 복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루터의 진정한 개혁의 자리(setting in Reformation)는 가톨릭과의 배타적 관계보다는 농민과의 관계에서 빛난다. 소작농은 루터의 개혁에 있어 든든한 하부 토대(플로레타리아트)였지만 루터의 과(過)를 말할 땐, 정작 이들의 혁명을 외면하였다고들 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후들은 루터의 이름을 빌려 그들 가운데 약 6000명을 처형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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