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에 대한 흔한 오해

이 글은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상’을 바로잡고자 작성한 글이다. 대개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을 마치 우리나라의 ‘현모양처’ 뉘앙스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릇된 이해이다. ‘현모양처’라는 단어만 해도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賢母良妻)라는 유교식 여성상으로 소개되고는 있지만, 사실 그 출처도 불분명하다. 일본식 여성상인 ‘양처현모’에서 들여온 여지도 있기 때문. (* 패전 후 일본의 재건을 이끈 것은 ‘야쿠자와 여성’이라는 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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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사탄이 된 원래의 경위

    이 글은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이상적인 신앙고백을 했던 장본인 베드로가 곧바로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위에 대하여, 특히 마가복음에 보존된 원 자료를 분석해 설명한 글이다. 일반적으로는 마태복음을 통해 이 이야기의 교훈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에 성공함으로 ‘천국의 열쇠’는 손에 쥐었지만, 사람의 일 곧, 수난 받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예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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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의 조상 수로보니게 여인

    엊그제 내가 무심코 그린 이 아이 주검에 대해 이어지는 애도의 반응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주검에 애도만 할 수는 없다는 반응이다. 즉 무슬림 난민을 분별없이 애도했다간 무슬림이 범람할 것이라는 따가운 눈총이었다. 이 아이는 시리아 아이이다. 시리아. 시리아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출신지와 동향이다.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시리아) 지역의 지중해 연안의 ‘베니게’(페니키아)를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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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유다는 택함 받은 제자인가?

    이 글은 요한복음에서 엿볼 수 있는 (구원에 관한) 예정론 문제를 간략하게 개진한 글이다. 우선 다음 문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ㅡ요 6:70.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이 문장은 ‘주님은 마귀도 택하시는가?’ 라는 당혹스런 문제를 안겨주는 문장이다. 위 개역개정은 의역이 된 편이지만 본래는 아래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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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끼라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ㅡ 엡 5:16 이 구절을 원어의 의미대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시간을 구원하면서 (살아가십시오) 하루하루가 악합니다. 1. “아끼라”가 왜 “구원하면서”가 되었는가 하면, “아끼라”로 번역된 ‘엨사고라조메노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속량했다’고 했을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참조. 갈 3:13; 4:5). 즉 시간을 ‘속량해 쥐고 있으라‘(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현재분사)는 뜻인 것이다. 2. 그리고 여기서 시간은 크로노스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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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τόπος)을 주의하라

    생명의 떡(요 6:35). ‘생명’과 ‘떡’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표적으로서 떡이 아닌 배부른 떡을 추구했다면, 떡보다 생명이 중요할 것이다. 영원한 양식을 취하라고 했으니까(요 6:26). 그러나 그가 지닌 생명이란 것이 타고난 성품이나 (발랄함 따위의) 인격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땐 생명보다 떡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예전(성찬)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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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의 “사단이여!”에 대한 기독교관(觀)

  ※ 이 글은 교의적인 글이 아님을 밝혀둔다. 기독교는 ‘복음주의’라는 명칭으로 순화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원리주의(fundamentalism) 성향이 내재된 교의 종교이기에 타 종교 또는 비 기독교인과 소통할 때면 언제나 상대를 ‘지옥 갈 대상’으로 전제하기 마련이다. 이런 전제가 기독교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이웃을 사마리아 대하듯 하는 태도로 표출될 때에는 기독교 ‘원리’에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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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벧에돔의 홍안(ruddy)에 관하여

    흔히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과정은 머릿속에 잘 새겨져 있는데, 그 사이 하나님의 법궤가 어디서 어디로 옮겨 다니는 지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법궤를 블레셋에게 한 차례 빼앗기긴 하는데 그 시점이 언제인지도 혼동하기 일쑤이다. 심지어 사울이 죽는 시점에서 법궤를 빼앗긴 줄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엘리 가문의 몰락과 사울 가문의 몰락이 흡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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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야

    이 글은 미국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성공함에 따라 거기서 사용된 법리와 판례가 이제 전 세계 동성애 합법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 자명한 시점에서, 단지 그들을 기이한(queer) 어떤 것으로만 일관하던 기독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될 지에 대해 쓴 글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카이스트의 한 교수가 자기 홈페이지에 노골적인 안티-크리스천 운동을 펼치면서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였다’는 장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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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설교를 이겨내는 성서일과

성서일과로 설교를 했을 때 과거(3년 전)의 논지와 지금의 논지 변화를 비교해본다. 신경숙 작가로 인한 문학계의 표절 이슈와 함께 기독교계에서도 표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설교를 놓고 표절 운운한다는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해 아래 새 것 없기 때문이다. 설령 표절해서 이익을 본다 하더라도 그 목회자의 영은 궤멸할 것이다. 독창적인 설교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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