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다윗의 홍안(ruddy)에 관하여

 이 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지만, ‘붉은 빛 아름다운’(삼상 16:12) 다윗을 (외모로) 선택하시는 모순된 장면에 관해 풀어 놓은 글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은 사무엘이 사울을 대신할 ‘새 왕’을 캐스팅하러 갔을 때에 나온다. 사실 사무엘은 첫 눈에 다윗의 큰 형 엘리압을 낙점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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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사람과 속사람’ 설교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

    이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표제 ‘겉사람과 속사람’에 관한 메시지가 별다른 주석 과정 없이도 성서일과에 의해 달라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달라졌다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인 것이다. 다음은 이번 주 성서일과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본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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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이교도(Ἑλληνιστής)였는가

  이 글은 초대교회의 처음 균열과 그 균열을 가르고 지나간 성령 자신의 길, 그리고 그 모든 궤적 중심선상에서 시그널로 작용하는 ‘방언’ 또는 ‘바람’의 텔로(θέλωㅡ임의로)를 정리한 글이다. 따라서 이글은 앞서 작성했던 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나와 노우호 목사의 악령 방언(γλώσση)설은 다 옳은가? 그리고 성경의 괴물 ‘리워야단’과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연장선상에 있다. (1) 초대교회의 분열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화급한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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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나

  이 글은 초대교회 원시 공동체들의 성령 인식 과정, 특히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독창적으로 인식했던 파라클레토스를 요약한 글이다. 우선 이번 주 성서일과 시편 가운데 이런 대목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성령강림절 성서일과에 웬 악어가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ㅡ시편 104:26 앞서 여러 차례 리바이어던 관련 글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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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c 신학과 교회를 침몰시킨 예수의 자의식

    어벤져스(2015)를 관람했다. 이야기 구조와 편집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전투 장면 뒤로 보이는 ‘즉석 떡볶이’라는 글자나 필리핀 따갈로그 처럼 들리는 우리말은 반갑기보다는 내가 사대주의자임을 각인시킬 뿐인 영화. 그런데 딱 하나, 매우 흥미로운 개념 하나가 내포되어 있는 걸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걸 설명하려면 이야기를 조금 ‘스포’해야 한다. 스포주의!   (1) 단독자 Vs. 독단자 어벤져스를 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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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하는 법

성서일과(lectionary)는 3년을 주기로 회전한다. 3년 주기로 같은 성경 본문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처럼 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적 예시이다. 동시에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며 내가 선호하는 방법의 전부도 아니다. 그 주차에 해당하는 성서일과와 그해에 직면한 맥락이 일치하란 법도 없을 뿐더러 시대와 사회상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성서일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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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매주 본문 정하는 방법

미문(美門)을 설립 이후 줄곧 ‘성서일과’를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다. 성서일과에 관심을 안 가져본 기독교인이라면 목회자일지라도 그 명칭이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 본문을 성서일과로 고집하기까지는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성서일과를 고집하는 세 가지 이유 첫째, 주제 설교를 지양하기 위해서이다. 주제 설교가 다 나쁜 건 아니지만 나 개인이 주제를 선정할 때에는 원천적으로 그 한계와 범주는 지엽적일 수밖에 없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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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포도나무’ 본문의 구조

    이글은 요한복음 15장 1-8절에 관한 해제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 하면 으레 당연한 관계 정도로 지나치지만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구문이 아니라 매우 미스틱(mythic) 한 개념에서 들여온 비유이기에 세밀한 읽기가 요구된다. 요한복음에서 자주 반복해서 언급되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에 대한 해제로 첨부된 본문이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위 도상과 같이 이해했던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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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부활과 조로아스터교 부활 구분법

    이 글은 기독교 부활이 유대교와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도 그외 이교도 부활과는 차별화 된 정통성에 대해 약술한 글이다. (1) 내세 사상에 따른 부활 진리의 혼동 영생과 부활은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내세(來世)와 관계된 진리이다보니 특히 문자적으로 ‘다시 살아나다’라는 개념인 부활은 다른 문명이나 종교와 중첩되는 경우가 있다. 고대 문명으로서 이집트와 인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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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과 요셉 톨레도트(Toledot/ תּוֹלְדֹת)

  이 글은 예수의 부활 이미지가 지나친 군주상(像)으로 편중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작성한 글이다. 예수의 파스카는 중세교회를 거치면서 강력한 군주의 귀환 정도로 변질된 일면이 있다. 군주로서 예수상에 매집된 나머지 교회가 그동안 수천 년간 무시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다음 상징들을 복원해냄으로써 참된 파스카 예수상을 제시할 것이다. 우선 다음 표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섯 가지로 간추린 창세기 요셉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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