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독교 십계명과 불교 십계명(십중계) 차이 알아두기

이글은 기독교 계명이 다른 계명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약술한 글이다. 보편성 계명이나 계율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불교에도 기독교의 십계명과 꽤 흡사한 십중계(十重戒)라는 것이 있다. 유교에서 비롯된 충·효·예의 경우는 내세(來世)가 있는 강제 법령은 아니나 우리 사회 통념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계명의 요소를 띠고 있다 하겠다. 특히 불교의 십중계는 위 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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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놋뱀은 가나안 컬트(cult) 인가?

 이 글은 민수기에 나오는 놋뱀이 모세가 수용한 가나안 컬트인가? 아닌가? 아니라면 왜 아닌지에 대해 논한 글이다. 불뱀 민수기 21장은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으로 많은 사람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모세에게 구조를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불 뱀’을 만들어 나무에 달아 그것을 쳐다보게 함으로써 해독의 방도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때 모세가 만들어 매단 것이 ‘놋뱀’이다. 불 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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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의 기원

    아브라함의 계약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래와 같이 5단계 이상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일 계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상대적 시행착오를 의미한다고 앞서 일러두었다. 아래 그림에서 우측의 주황색은 그 계약의 단계별 변형을 – 즉 암시로부터 점점 베일을 벗는 – 추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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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계약이 지닌 성질

  가인의 족보에서 마지막 후손은 두발가인으로 6번째 후손이다. 완전수 7번째 후손이 그의 족보엔 없다. 반면 죽은 아벨을 대신한 셋의 족보에서는 7번째 후손 라멕을 지나 8대손 노아까지 이어지는 동안 6번째 후손인 므두셀라가 계속 따라붙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가 마지막 종말의 순간까지 죽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아벨/셋으로부터는 6번째 후손이지만 아담으로부터는 7번째 완전수를 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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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가 받았던 변화

    이 글을 읽기 전에 나는 이념적으로는 거의 극우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러둘 필요가 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고문기술자’로 더 잘 알려진 이근안 전 목사에 대해 언급하였다. 성서일과 주제가 ‘변화’였기 때문이다. 특히, 파문당한 그는 변화를 받긴 했던 것인가? 변화 받았는데 다시 돌아간 것인가? 아니면 아예 변화를 받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근안만이 아닌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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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퇴마사로 전락시키는 교훈

  지난주 본의 아니게 귀신 쫓는 행위를 격하시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마어마한 능력 행하는 분들이 지금 여기 오셔서 능력을 행하며 우릴 들었다 놨다 은혜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 앞서 모든 논지는 일시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 것만 같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종국에 혹시 그 능력 행하던 분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그때 이 논지는 여전히 유효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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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권위) 있는 새 교훈으로 흔히 범하는 오류

    귀신 쫓는 장면이 금주 성서일과 본문이다. 요즘도 많이들 쫓나 모르겠다. 예수님의 축귀는 상징인가 실재인가? 자의든 타의든 요즘의 교회는 직접 악령을 쫓기보다는 심리요법 등으로 해결을 보는 것 같다. 심리 요법은 더 타당한가? (1) 악령 축출 체험 젊을 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중에 학생들에게서 악령 드러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A 학생에게 성경 구절 한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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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유년기에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나라 온 동네 구석구석을 언젠가는 빠짐없이 다 밟겠지…?’ 지형이나 지리에 대한 공간 감각이 부족한 연령기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마음에도 살 날에 관한 시간이 앞으로 밟을 지리에 대한 공간보다는 더 길게 느껴서였을 것이다. 정말로 전국의 골목 골목을 다 가볼 줄 알았지만, 현재 거주지에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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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주제는「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

    이글은 한 2년 전 쯤 “휴거, 베리칩, 바른 종말론”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했던 글인데, 현재는 “종말의 주제는「휴거,바코드,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로 더 알려진 것 같다. 이 글을 쓸 때보다 종말론도 더 맹렬해진 상태이고 또 그 제목도 더 적합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정서해 올린다. 이글은 지금은 “종말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이 아니라 그렇게 맹렬해져가는 “종말의 양태들”에 대해 지적한 글이다.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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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막내가 불현듯 “왜 사는지를 모르겠어요. 다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서 가장 명랑한 소녀도 저런 말을 하는가? 해서이다. 걱정보다는 ‘이제 마음의 조직이 시작된건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큰 녀석도 거쳤거니와 이제 이 꼬맹이도 시작인가 하는 생각에 스핑크스 앞에 선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모든 인간의 길. Musée du Louvre, Paris, Attributed to the Menel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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