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신학

세월호, 기독교식 구원의 문제

    ※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모두가 그랬듯이 세월호 사고의 충격 여파로 다분히 감정에 젖은 가운데서 구원론에 관한 회의적 시각을 담았던 글이다. 그러나 3년이 흐르면서 상처 받은 사회의 다양한 격변 속에서, 진리란 왜 불변해야 하는지 깊은 반성으로 수정을 가하였다. 세월호 침몰로 인한 국민적 슬픔이 사흘도 안 되어 양분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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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이 사람을(에케 호모)

안병무의 신학을 내 개인적으론 거부하지만 이 사순의 종말에.., 이 민족의 그칠줄 모르는 죄성과 극악 무도한 심장 밑에 깔려 나뒹구는 저 아이들을 이렇게 불러야만 되겠다… 보라 이 사람들을(엑세 호미네스). 오주여 우리가 잘못했나이다… * 요 19:4. * 2014/4/18/ 금, 사순절 서른아홉째날. ** 크로스로 기고문: 보라! 이 아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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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응답을 즉시로 듣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어왔다. “Yes,” “No,” “Wait.” 그러면서도 언제나 응답은 사실상 “기다림”(Wait)이라는 합의 결론으로 종용해오는 바람에 응답 구하는 당사자는 그 기다림을 볼모로 시간과 물질을 착취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가운데 1:16-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대목에서 그 세 가지 응답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진다. “<믿음에>라 함은 하나님 그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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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의 본말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 매장되었다며 찾아 헤매는 노력은 실로 허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방주가 지닌 ‘본말’ 보다는 그것을 채증해보이겠다는 ‘과학’에 대한 맹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맹신은 대개 방주를 축조해낸 한 ‘가정의 이야기’라는 본말 대신에 그 방주의 크기에 더 관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발굴한 방주가 생각 보다 작으면 어쩌려고? 아니 이미 발견했지만 생각보다 작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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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어디론가 내던지는 권능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사람만 가능하다. 나를 일종의 타자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는 이 능력을 통해 나 자신을 어디론가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 혹은 미래로. 여기서 말하는 과거와 미래의 구체적 실체는 죽음이다. 두려움도 여기서 발생한다. 죽음은 통증이 아닌데도 두려움인 것은 그것이 종료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강박을 타고 산출 되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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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신은 제우스

영원하시며 그 위에 더하여질 어떠한 것도 존재치 않는 그분의 빛을 우리는 여러 빛 가운데 하나로 수용하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무형이면서도 초자연적인 빛으로서 우리 자신의 빛이 생산해낸 최고의 성공작이었다. 그리고는 그 견고한 진속에서 상당히 지속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빛이 발견되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바 된것이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효용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지금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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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되지 못할 것들에 관하여

용서되지 못할 것은 그들의 하나님 없음이다. 이는 그분의 영원하신 힘이 내포된 그분의 언어가 명백한 환경적 행위 속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미 그분을 저항하는 예배를 일으켰음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자연계(natural)와 영계(spiritual)와 그리고 그 모든 권능들(other forces)의 중심선상에서 그것을 드러내셨다.또한 용서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의롭지 못함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증거를 내포한 명백한 요인들이 드러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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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구약성서

“그 모든 사람들, 그 모든 계급들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의(義)의 보편적 비밀, 곧 그 위대함이 바로 복음 속에서 폭로되었다.” 라고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의(롬 1:17)를 주석하면서 이와 같이 “복음”(In the Gospel)으로 국한지어 버렸다면, 구약은 여기에 포함 되는가, 아니 되는가. 그렇다면 “구약은 복음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못 그런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투사된) 구약만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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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호의 해바라기는 노란 색이 아닌가?

오늘 담장을 지나다가 깜짝 놀랍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전혀 꽃의 형체가 없었는데 완연한 해바라기가 되어있습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만나는 해바라기는 깜짝 놀랄만한 노란 색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노란 색 해바라기를 보자마자 고호의 가 생각나서 얼른 한 장 찍어두었습니다. 찍어두면서 무심코 생각난 것이 고호의 해바라기는 노란 색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랍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6점 정도의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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