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일과

성서일과 Liturgical Calendar 교회력(敎會歷)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력은 이와 같은 주기를 갖습니다. Advent(강림절 또는 대림절)로부터 교회력이 출발합니다. 그런 다음 Ephiphany(현현일)을 기점으로 시간이 진행되다, Lent(사순절) 기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하여 심화됩니다. 부활 후에는 성령 강림을 향하여 전개됩니다. 그러고서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을 통한 삶의 여정이 다음 강림절까지 지속되는 구조입니다.  가톨릭의 교회력은 약간 다릅니다.  성령강림(Pentecost)이 약화되거나 아예  없고, 트리디움(Triduum)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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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하는 법

성서일과(lectionary)는 3년을 주기로 회전한다. 3년 주기로 같은 성경 본문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처럼 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적 예시이다. 동시에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며 내가 선호하는 방법의 전부도 아니다. 그 주차에 해당하는 성서일과와 그해에 직면한 맥락이 일치하란 법도 없을 뿐더러 시대와 사회상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성서일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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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매주 본문 정하는 방법

미문(美門)을 설립 이후 줄곧 ‘성서일과’를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다. 성서일과에 관심을 안 가져본 기독교인이라면 목회자일지라도 그 명칭이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 본문을 성서일과로 고집하기까지는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성서일과를 고집하는 세 가지 이유 첫째, 주제 설교를 지양하기 위해서이다. 주제 설교가 다 나쁜 건 아니지만 나 개인이 주제를 선정할 때에는 원천적으로 그 한계와 범주는 지엽적일 수밖에 없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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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가지 율법 전문

‘613가지 율법’이란 제식화된 명칭은 아닙니다. 출애굽 광야 생활에서 도출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신빙성이 없습니다. 613가지 율법은 사실 후기 유대이즘의 성격을 더 반영합니다. 10계명을 확대하는 성질을 가진 유권 해석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질을 통해서 후기 유대이즘 종교 지도자는 교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신약’은 축소지향적입니다. 이것이 당대 유대이즘과의 충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정점에 있는 10계명이 과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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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과 요셉 톨레도트(Toledot/ תּוֹלְדֹת)

  이 글은 예수의 부활 이미지가 지나친 군주상(像)으로 편중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작성한 글이다. 예수의 파스카는 중세교회를 거치면서 강력한 군주의 귀환 정도로 변질된 일면이 있다. 군주로서 예수상에 매집된 나머지 교회가 그동안 수천 년간 무시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다음 상징들을 복원해냄으로써 참된 파스카 예수상을 제시할 것이다. 우선 다음 표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섯 가지로 간추린 창세기 요셉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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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주제는「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

    이글은 한 2년 전 쯤 “휴거, 베리칩, 바른 종말론”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했던 글인데, 현재는 “종말의 주제는「휴거,바코드,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로 더 알려진 것 같다. 이 글을 쓸 때보다 종말론도 더 맹렬해진 상태이고 또 그 제목도 더 적합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정서해 올린다. 이글은 지금은 “종말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이 아니라 그렇게 맹렬해져가는 “종말의 양태들”에 대해 지적한 글이다.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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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11장,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는 누구인가?

  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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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갚음을 끊는 길

프롤로그 |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1세기경 로마의 관리 중에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약 4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 당시의 로마가 시내 관리를 위해 약 700명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이다. 그런데 그 집에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침실에서 일하는 노예 중 한 명이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당시는 네로 치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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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프롤로그 | 야웨 치드케누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성경에서 정의는 신의 이름과 결합된 칭호이기 때문이다. ‘야웨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즉, ‘야웨 우리의 공의(義)’라는 칭호가 그것이다(렘23:6). “야웨 치드케누”라는 말은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으로 메시야를 예언할 때 언급된 이름이다. 한글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읽혀 단지 평이한 문장으로 묻혀 읽히기 십상이지만 영어 역본에서는 언제나 대문자 LORD 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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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폭로

프롤로그 | Man at Work (1883)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한 화가로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경이로울 정도의 농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당시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테오. 내가 그들 가운데서 뭐든 형체가 될 만한 그 뭔가를 그린 풍경을 볼 것 같으면, 난 분명 풍경 화가는 아니야…” 이 그림만 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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