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신학

“사람을 낚는 어부ㅡ”라 하신 적이 없다

이 글은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을 위해 쉽게 쓴 글이다. 전공자나 신학적인 기반이 있는 독자의 경우 신학적 문제가 작동한다면, 보다 전문적으로 쓰인 이 글까지 읽어야 한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ㅡ”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성경 구절 중 한 말씀일 것이다. 특히 공격적인 믿음의 실천 근거로 많이 활용해온 본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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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걱정한 민족주의

전설에 따르면 나다나엘은 인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선교하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를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승에 기인해 그에 관한 작품은 대부분 참혹한 도상을 띤다. 그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치열한 영성을 간직한 작품은 밀라노 두오모 성당(Duomo di Milano)에 세운 입상일 것이다. 마르코 다그라테(Marco d’Agrate) 작품으로 사도상은 대개 긴 겉옷을 두르고 그 권위와 기품을 드러내지만 나다나엘이 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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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은 같은가 다른가?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은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사실상 이음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고, 또 역사적 문맥에서도 이 셋은 동일한 의미로 서술되지만 각각의 고유한 의미는 다른 것이다. 이 ‘다르다’는 사실은 ‘같다’는 사실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왜 중요한가 살펴보자. 1. 이스라엘인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가 다투다’, ‘싸웠다’, ‘힘썼다’는 동사 사라(שָׂרָה)에서 비롯된 ‘이스라’(יִשְׂרָ)와 하나님의 칭호 ‘엘’(אֵל)이 합쳐서 된 말이다. 즉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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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Συμεών)에 관한 기호와 해석

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이란 길을 내서 걷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유년 시절에 생각하기를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이 세상의 모든 길을(심지어 골목길까지) 한번쯤은 반드시 밟고 지나가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헛된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인간은 누구나 매우 한정된 길과 공간을 맴돌다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히 많은 지식을 접하고 경험하고, 무수한 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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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은 좌파였다 (II)

과거에 “바리새인은 좌파였다 (1)”는 글을 썼을 때 수많은 친구들이 떨어져나갔다.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지만 바리새인이 좌파였다는 사실은 매우 학술적인 관찰의 결과다. 이 글에서는 전편에 다소 생략했던 내용들을 조금 더 기술해놓았다. 예수님 당대에 유대인의 당파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헤롯파(당), 열심파(당), 에세네파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일종의 정파(政派)였다. 왜냐하면 헤롯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당파가 하스모니아 가문(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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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일곱 번(77) 용서해야 하나, 일흔 번씩 일곱 번(490) 용서해야 하나

이 글은 희년의 본질을 밝히는 글이다. 부활절의 성립은 유월절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궁극적 실천은 희년(禧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희년의 범주와 근거]– 매매 된 토지 환원 (레 25:29-34)– 노예의 해방 (레 25:39-41, 47-54)– 부채 면제/ 채권, 채무의 소멸 (신 15:1-3; 레 25:35-37) [희년의 유래 및 취지]– 유배 시대 및 유배 끝에 작성된 사제문헌(P)– 빚으로 종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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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유교병(아르토스)을 사용했나?

    성만찬의 제정은 부활절과 직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식사가 곧 성만찬으로서, 기독교 예전의 총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절(Easter)이라는 말 자체는 성경 용어는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히려 이교적 양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날은 본디 3세기까지만 해도 파스카(πάσχα/ 유월절)로 불리며 기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c.f. 고전 5:7; 행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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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기원

이글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관통하는 사탄의 기원에 관한 글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바깥 세계관을 이어주기 위한 문학적 상징의 해석학적 유추이지, 조직신학이나 어떤 교리적 전통을 개정하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다. 우선 크로노스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크로노스는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Cronos(Kronos, Κρόνος)와 Chronos(Khronos, Χρόνος)는 다른 것이다. 전자는 농경의 신이고 후자가 시간의 신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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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새 관점’으로 둔갑한 ‘헌 관점’

    이 글은 대부분의 칭의 논쟁에 있어 일체 간과되어 버린 전제 요소들(이를테면 히브리서 Πίστις의 배경)을 요약한 글이다. 우선 다음 표로 구성된 개요를 자세히 관찰하고, 부연 설명을 읽으면 좋다. 1) 유대교가 원래는 은혜의 종교였다는 사실은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구약에 관한 개론이 들어선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구약에 관한 개론이 없는 학자가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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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로 들어본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홍성사 회보에 실린《철학과 신학의 몽타주》서평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서평은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를 강의로 직접 들었던 학생의 서평이기도 합니다. 해당 회보(12월호) 전체를 보시려면 http://goo.gl/npYSRK 다음 주소로 가셔서 네이버 포스트로 보셔도 편합니다. http://me2.do/xy8D0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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