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는 택함 받은 제자인가?
이 글은 요한복음에서 엿볼 수 있는 (구원에 관한) 예정론 문제를 간략하게 개진한 글이다. 우선 다음 문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ㅡ요 6:70.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이 문장은 ‘주님은 마귀도 택하시는가?’ 라는 당혹스런 문제를 안겨주는 문장이다. 위 개역개정은 의역이 된 편이지만 본래는 아래와 같은 […]
이 글은 요한복음에서 엿볼 수 있는 (구원에 관한) 예정론 문제를 간략하게 개진한 글이다. 우선 다음 문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ㅡ요 6:70.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이 문장은 ‘주님은 마귀도 택하시는가?’ 라는 당혹스런 문제를 안겨주는 문장이다. 위 개역개정은 의역이 된 편이지만 본래는 아래와 같은 […]
※ 이 글은 교의적인 글이 아님을 밝혀둔다. 기독교는 ‘복음주의’라는 명칭으로 순화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원리주의(fundamentalism) 성향이 내재된 교의 종교이기에 타 종교 또는 비 기독교인과 소통할 때면 언제나 상대를 ‘지옥 갈 대상’으로 전제하기 마련이다. 이런 전제가 기독교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이웃을 사마리아 대하듯 하는 태도로 표출될 때에는 기독교 ‘원리’에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성철의 “사단이여!”에 대한 기독교관(觀) 더 보기 »
이 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지만, ‘붉은 빛 아름다운’(삼상 16:12) 다윗을 (외모로) 선택하시는 모순된 장면에 관해 풀어 놓은 글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은 사무엘이 사울을 대신할 ‘새 왕’을 캐스팅하러 갔을 때에 나온다. 사실 사무엘은 첫 눈에 다윗의 큰 형 엘리압을 낙점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이 글은 동성애를 용인하고 묵인하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동성애 합법화의 저지선은 대개 관습적, 생물의학적, 심리학적, 법학적, 신학적 단계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심리학적 저지선이 무너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각종 친 동성애 법안 개정과 발효에(동성애 결혼법, 차별금지법 등) 가속도가 붙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저지선은 교회와 신학일 텐데, 도리어 일부 목회자와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1919년)은 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중에 하나로 꼽을 정도로 센세이셔널 한 저서이다. 칼 바르트를 세상에 알린 이 책은 한 마디로 ‘초월적 하나님’ 앞에서의 ‘유한한 인간’인 자신의 고백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스위스의 초라한 탄광촌 사펜빌(Safenwil)에서 전혀 존재감 없던 목사였던 까닭일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이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잊어버렸을때, 칼 바르트의
성경의 괴물 ‘리워야단’과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글은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에 관한 테마로 교회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티프를 제공하기 위해 쓰였지만 성경에 나타난 어떤 상징을 오늘날의 의미로 가져오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그것은 300년도 더 된 이 책이 담은 이해를 통해 성경에 등장하는 그 악의 상징을 오늘날 어떻게 가져와야 하는지 그 방법을 고찰하였다. (1) 홉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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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70인역(Septuagint) 번역자들이 이 독자적 정신성 단위 ‘독사’를 구약의 가봇(영광)에 대한 대응어로 채택해 온 궁극적 근거는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주’(shekinah) 할 수 있는 가장 우월한 정신 입자를 설명하기에 용이한 개념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쉐카이나가 존재의 양식이라면 독사는 일종의 그 존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 연관글1. 희랍어 독사(δόξα)가 어떻게 영광(Glory)이 되었나2. 플라톤이 독사(δόξα, 영광)를 싫어했던 경위에
독사(δόξα, 영광)가 현대 기독교인에게는 최상의 영예로운 영적 상태와 지위를 표명하는 어휘가 되었지만 플라톤(Plato)은 이를 아주 경멸하였다고 한다. ‘견해’ 또는 ‘의견’이라는 뜻을 지닌 이 독사의 개념을 앞서 오늘날의 언론 매체 사설 따위로 예를 들은 바 있다. (각 언론사 사설은 마치 독자적 견해인 것처럼 임하지만 언제나 자기 이념의 권역에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노선을 꾀하는 것, 그리하여 마치 독.자.적.인.
플라톤이 독사(δόξα, 영광)를 싫어했던 경위에 대해 더 보기 »
기독교인이 의미심장하게 사용하는 용어 ‘영광’을 희랍어로 독사(δόξα)라고 한다. 그러나 이 δόξα는 본래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의미로서의 ‘영광’으로는 용례의 빈도수가 낮은 용어였다. 그 쓰임새가 주로 opinion 즉 ‘견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독사’가 영광(Glory)으로 전용되기까지는 셉투아진트 번역자들의 공헌이 크다. 그들이 희브리어 카봇(כָּבוֹד, 영광)을 독사로 번역해놓은 까닭이다. 그들은 왜 ‘카봇’을 독사로 번역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사’가 기대함으로 (바라)본다!는 뜻을
희랍어 독사(δόξα)가 어떻게 영광(Glory)이 되었나 더 보기 »
천안 한 법정 앞에 세워진 정의의 상이다. 팔뚝상 정의(Justice)의 심볼로 세워진 동상은 대개가 여신상인데 이 동상은 기이하다. 여신은커녕 상반신·하반신도 없고 팔뚝만 있다. 게다가 이상한 말이 적혀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 땅에는 정의를(???)”. 솟아날 구멍이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을 포함, 주로 법정 앞에 정의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지만 유럽에서는 교회, 학교에서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심볼이다. 이 여신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