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일과─매주 본문 정하는 방법

미문(美門)을 설립 이후 줄곧 ‘성서일과’를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다. 성서일과에 관심을 안 가져본 기독교인이라면 목회자일지라도 그 명칭이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 본문을 성서일과로 고집하기까지는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성서일과를 고집하는 세 가지 이유 첫째, 주제 설교를 지양하기 위해서이다. 주제 설교가 다 나쁜 건 아니지만 나 개인이 주제를 선정할 때에는 원천적으로 그 한계와 범주는 지엽적일 수밖에 없다.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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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가지 율법 전문

‘613가지 율법’이란 제식화된 명칭은 아닙니다. 출애굽 광야 생활에서 도출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신빙성이 없습니다. 613가지 율법은 사실 후기 유대이즘의 성격을 더 반영합니다. 10계명을 확대하는 성질을 가진 유권 해석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질을 통해서 후기 유대이즘 종교 지도자는 교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신약’은 축소지향적입니다. 이것이 당대 유대이즘과의 충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정점에 있는 10계명이 과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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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과 요셉 톨레도트(Toledot/ תּוֹלְדֹת)

  이 글은 예수의 부활 이미지가 지나친 군주상(像)으로 편중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작성한 글이다. 예수의 파스카는 중세교회를 거치면서 강력한 군주의 귀환 정도로 변질된 일면이 있다. 군주로서 예수상에 매집된 나머지 교회가 그동안 수천 년간 무시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다음 상징들을 복원해냄으로써 참된 파스카 예수상을 제시할 것이다. 우선 다음 표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섯 가지로 간추린 창세기 요셉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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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놋뱀은 가나안 컬트(cult) 인가?

 이 글은 민수기에 나오는 놋뱀이 모세가 수용한 가나안 컬트인가? 아닌가? 아니라면 왜 아닌지에 대해 논한 글이다. 불뱀 민수기 21장은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으로 많은 사람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모세에게 구조를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불 뱀’을 만들어 나무에 달아 그것을 쳐다보게 함으로써 해독의 방도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때 모세가 만들어 매단 것이 ‘놋뱀’이다. 불 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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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주제는「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

    이글은 한 2년 전 쯤 “휴거, 베리칩, 바른 종말론”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했던 글인데, 현재는 “종말의 주제는「휴거,바코드,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로 더 알려진 것 같다. 이 글을 쓸 때보다 종말론도 더 맹렬해진 상태이고 또 그 제목도 더 적합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정서해 올린다. 이글은 지금은 “종말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이 아니라 그렇게 맹렬해져가는 “종말의 양태들”에 대해 지적한 글이다.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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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오브갓(2014)을 나더러 만들라면

    지난주 <선오브갓>(2014)에 관한 기고를 하나 냈다. 어떤 웹진의 요청에서였는데 영화 실제 내용보다는 ‘플롯’이란 개념에 대해서만 좀 언급했다. 기고문: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837   종려주일. 이 ‘호산나’ 플롯의 핵심은 <배신>이다. 배신 해본 적 있는가? 아니면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가? 대부분 배신을 당했던 것만 말하지 자기가 배신한 건 잘 말하지 않는다. 특히, 누구보다도 배신의 방점을 찍었던 인물이 자기를 배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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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프롤로그 | 야웨 치드케누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성경에서 정의는 신의 이름과 결합된 칭호이기 때문이다. ‘야웨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즉, ‘야웨 우리의 공의(義)’라는 칭호가 그것이다(렘23:6). “야웨 치드케누”라는 말은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으로 메시야를 예언할 때 언급된 이름이다. 한글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읽혀 단지 평이한 문장으로 묻혀 읽히기 십상이지만 영어 역본에서는 언제나 대문자 LORD 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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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시

게하시는 구약성서 열왕기하에서 14번 정도 언급되는 엘리사의 사환 이름이다. 이 글은 그렇게 큰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닌 게하시가 신약성서에서 어떻게 환기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본 설교 요지문이다. 프롤로그: 호모보누스와 프란치스코 1197년 경에 활동하던 호모보누스라는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번창시켜 사업에서 버는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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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헤겔의 합리적 신(神)의 죽음

      헤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을 다시 한번 찬찬히 보았다. 강의 내용상 을 주제로 엮어 쓴 논평 하나와, 라는 주제에 끌어다 쓴 논평 하나, 이렇게 상반된 두 입장을 같이 비교하면서 이 이야기를 변증법 예제로 활용했다. 경향신문이 전자 관점에서 시대 배경과 함께 평론 하나를 내놓은 적 있고, 조선일보가 “장발장은 100% 희생자인가?”라는 제하에 마치 전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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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은 경사인가 애사인가

종려주일.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문장을 마치 성도들이 가진 재물을 과감하게 청구도 하고 맘대로 가져다 쓸 수 있게 하는 구절로 가르치거나, 심지어 그런 내용과 제목으로 쓴 일개 간증책을 단체로 구입해 교회 프로그램에 접목하는 걸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프롤로그 본래 초대교회 설립자는 메시아가 볼품 없는 나귀를 새끼 타고 입성한 일에 대해 해명해야만 했다. (1) 마가는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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