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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에 집중할 수 있는 예배. | the righteousness of God | Since April 8, 2012.

코이노니아는 ‘공유’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공유, 공생, 공감 따위를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슷한 것 같지만 코이노니아와는 다른 개념들이다. 1. 우선 공유에 대한 정의이다. 공유란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권이 지분 형태로서의 공동에게 귀속된 소유의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지극히 법정적 성질의 개념이다. 단일한 소유권을 여럿이서 분량적으로 분할해 소유하는 상태를 이르기 때문이다. 옛날에 중형교회에 있을 때, 어떤 여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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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

    고대 심리학 『데 아니마』를 누구나 읽기 쉽도록 재구성한 책  『데 아니마』는 자연과학과 생물학적 필치로 이루어졌지만 고대 심리학으로 분류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저이다. 이 고대 심리학 원전을 읽기 쉽도록 재구성했다. 모든 일반인은 물론 뇌과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기독교인조차,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면 ‘영혼에 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서는 안.되.는.지.를 펼쳐서 보여준다. (데 아니마는 ‘영혼에 관하여’라는 뜻이다.) 영양섭취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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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가정불화” 본문주석

    신약성서에 나오는 ‘가정불화’ 본문은 두 가지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둘은 같은 어록(Q)이지만 다르게 다루고 있다. 이 글은 누가복음 중심의 주석이다. 우선 마태의 본문부터 볼 필요가 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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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

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에 수록된 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주기도문’ 텍스트는 누가복음에도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어떻게 다른 지에 관해 정리한 글입니다. 해석학 이론에 관한 해석 예시이기도 합니다. 주기도문은 부적인가? 언젠가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시의회 회의장에서 어떤 자가 사탄을 소환하는 기도를 하자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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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받은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 계시)

    바울은 살아생전에 평생을 정체성에 시달렸다. 그가 과연 사도인가? 라는 문제인데 자고로 사도라 함은 두 가지 요건 즉, 실존 예수의 목격자이면서 그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실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베드로나 주의 형제 야고보 같은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도성(apostleship)문제는 복음 전도 때 겪는 일반적인 장벽과는 별개로,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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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구원―칭의(“의롭다 하다”)

    근간에 기독교인의 타락을 알리는 잦은 소식으로 공연히 ‘칭의’의 교리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중생과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인데 구원 받은 자가 어찌 저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의 진리인 칭의는 구원된 신분을 표지하는 정의이지, 그 개개인의 윤리를 표시하는 지표가 아닙니다. 칭의(δικαίωσις, 동사 δικαιόω /의롭다고 하다)라는 단어는 본래 바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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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행동’ 자체

    * 성령을 어떤 추상적인 ‘덩어리’로 여기는 막연한 전제가 있기 마련이나 그 영의 실체는 ‘행동’ 자체임을 주석. 우선 다음 본문을 유념할 것이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ㅡ(롬 8:13-14)고 했을때, 14절을 이렇게 번역하면 훨씬 더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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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버지를 ‘아는’(ἔγνω) 원리

    * 이글은 우리가 ‘아버지를 안다’고 했을때 그 ‘아는’ 방식에 관해 쓴 글이다.     사진으로 보니 제법 광택이 나지만 실물은 볼품없이 낡은 30-40년이 족히 넘은 시계다. 3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새 시계를 차면서 이걸 금고에 재워 두는 것을 내가 어느 날 보고서는, “아버지 그 시계 저 주세요.” 했더니 어린 나에게 선뜻 내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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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꿈 해석 (2) – συνέκρινεν

    ※ 이 글은 꿈과 해석에 관한 기독교인의 바른 이해를 위해 쓰는 연재 글이다.       지난 월요일 수업 시간에 구약의 예언자 특히,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이 당대에 친일파 소리 들었을 ― 그들은 친 바벨론파였다 ― 예언자들의 삶과 예언 그리고 성취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4년여 전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했다. 그 꿈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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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신으로 과연 구원 받을까?

    내가 청년 때에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고 나서 여러 변화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시 홍대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홍대 앞에서 강남역에 갈 때에는 항상 47번 좌석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 버스가 얼마나 드물게 오는 지, 47분 만에 한 번 오기 때문에 47번 버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예수님 믿고 생긴 변화란, 집을 나서면서부터 ‘하나님, 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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