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로 들어본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홍성사 회보에 실린《철학과 신학의 몽타주》서평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서평은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를 강의로 직접 들었던 학생의 서평이기도 합니다. 해당 회보(12월호) 전체를 보시려면 http://goo.gl/npYSRK 다음 주소로 가셔서 네이버 포스트로 보셔도 편합니다. http://me2.do/xy8D0Css
홍성사 회보에 실린《철학과 신학의 몽타주》서평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서평은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를 강의로 직접 들었던 학생의 서평이기도 합니다. 해당 회보(12월호) 전체를 보시려면 http://goo.gl/npYSRK 다음 주소로 가셔서 네이버 포스트로 보셔도 편합니다. http://me2.do/xy8D0Css
이 글은 메릴스트립(Maryl L. Streep)이 영화《킹콩》(1976) 여배우 오디션에서 떨어졌던 날을 회상하는 포스팅입니다. (이 사진은) 내가 영화《킹콩》(1976)에 출현하기엔 너무 못 생겼다는 소릴 들으며 퇴자 맞고 집에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내게 중요한 전기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하나의 악평으로 인해 내가 배우가 되고자 하는 꿈으로부터 좌절하느냐, 아니면 나 스스로를 독려해 나에 대한 믿음으로 밀어부치느냐 (하는 순간)였던 것입니다. 나는
홍성사를 통해 출간한 책 한 권 소개합니다. 세계관을 넓혀주는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작성한 리뷰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http://goo.gl/oMcRMr 이 책의 집필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선 이 책은 이 시대에 목사나 장로/집사의 아들들이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걱정하는 마음에서 펜을 든 동기가 좀 있습니다. 2) 그래서 작가 심중에 내걸린 캐치프레이즈가 안티 해체(Anti-Dissolution)였습니다. 3) 그러나 공교롭게도 해체는 해체를 통해
영화 인턴(2015)에 관한 짧은 소고이다.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를 좋아하기 때문. 둘째, 로버트 드니로가 노익장! 멋진 연륜으로 철없는 젊은 여성(Anne Hathaway)의 경영권 방어 따위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머 그런 박진감 있는 영화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상을 빗나가 약간은 시시한 ‘사랑’에 집중하고 있다.시시하다는 건 (로버트 드니로를 기대한) 내
영화 인턴 (2015), 로버트 드니로는 왜 울었을까? 더 보기 »
이 글은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상’을 바로잡고자 작성한 글이다. 대개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을 마치 우리나라의 ‘현모양처’ 뉘앙스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릇된 이해이다. ‘현모양처’라는 단어만 해도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賢母良妻)라는 유교식 여성상으로 소개되고는 있지만, 사실 그 출처도 불분명하다. 일본식 여성상인 ‘양처현모’에서 들여온 여지도 있기 때문. (* 패전 후 일본의 재건을 이끈 것은 ‘야쿠자와 여성’이라는 말이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에 대한 흔한 오해 더 보기 »
이 글은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이상적인 신앙고백을 했던 장본인 베드로가 곧바로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위에 대하여, 특히 마가복음에 보존된 원 자료를 분석해 설명한 글이다. 일반적으로는 마태복음을 통해 이 이야기의 교훈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에 성공함으로 ‘천국의 열쇠’는 손에 쥐었지만, 사람의 일 곧, 수난 받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예수님의
엊그제 내가 무심코 그린 이 아이 주검에 대해 이어지는 애도의 반응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주검에 애도만 할 수는 없다는 반응이다. 즉 무슬림 난민을 분별없이 애도했다간 무슬림이 범람할 것이라는 따가운 눈총이었다. 이 아이는 시리아 아이이다. 시리아. 시리아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출신지와 동향이다.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시리아) 지역의 지중해 연안의 ‘베니게’(페니키아)를 뜻하기 때문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ㅡ 엡 5:16 이 구절을 원어의 의미대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시간을 구원하면서 (살아가십시오) 하루하루가 악합니다. 1. “아끼라”가 왜 “구원하면서”가 되었는가 하면, “아끼라”로 번역된 ‘엨사고라조메노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속량했다’고 했을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참조. 갈 3:13; 4:5). 즉 시간을 ‘속량해 쥐고 있으라‘(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현재분사)는 뜻인 것이다. 2. 그리고 여기서 시간은 크로노스가 아닌
예슈아. 최근 고토신학을 추종하는 이들 중심으로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급부상하고 있어 몇 가지 유념할 것들을 급히 정리하였다. 예수를 버리고 예슈아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음 포스터에 잘 요약된 것 같아 우선 옮겨왔다. 그러면 상기의 주장이 왜 빈약한 근거인지 설명해 드리겠다. 다들 익히 알다시피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 이 글은 교의적인 글이 아님을 밝혀둔다. 기독교는 ‘복음주의’라는 명칭으로 순화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원리주의(fundamentalism) 성향이 내재된 교의 종교이기에 타 종교 또는 비 기독교인과 소통할 때면 언제나 상대를 ‘지옥 갈 대상’으로 전제하기 마련이다. 이런 전제가 기독교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이웃을 사마리아 대하듯 하는 태도로 표출될 때에는 기독교 ‘원리’에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성철의 “사단이여!”에 대한 기독교관(觀)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