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설교를 이겨내는 성서일과
성서일과로 설교를 했을 때 과거(3년 전)의 논지와 지금의 논지 변화를 비교해본다. 신경숙 작가로 인한 문학계의 표절 이슈와 함께 기독교계에서도 표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설교를 놓고 표절 운운한다는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해 아래 새 것 없기 때문이다. 설령 표절해서 이익을 본다 하더라도 그 목회자의 영은 궤멸할 것이다. 독창적인 설교를 원한다면 […]
성서일과로 설교를 했을 때 과거(3년 전)의 논지와 지금의 논지 변화를 비교해본다. 신경숙 작가로 인한 문학계의 표절 이슈와 함께 기독교계에서도 표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설교를 놓고 표절 운운한다는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해 아래 새 것 없기 때문이다. 설령 표절해서 이익을 본다 하더라도 그 목회자의 영은 궤멸할 것이다. 독창적인 설교를 원한다면 […]
이 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지만, ‘붉은 빛 아름다운’(삼상 16:12) 다윗을 (외모로) 선택하시는 모순된 장면에 관해 풀어 놓은 글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은 사무엘이 사울을 대신할 ‘새 왕’을 캐스팅하러 갔을 때에 나온다. 사실 사무엘은 첫 눈에 다윗의 큰 형 엘리압을 낙점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이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표제 ‘겉사람과 속사람’에 관한 메시지가 별다른 주석 과정 없이도 성서일과에 의해 달라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달라졌다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인 것이다. 다음은 이번 주 성서일과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본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겉사람과 속사람’ 설교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 더 보기 »
이 글은 초대교회의 처음 균열과 그 균열을 가르고 지나간 성령 자신의 길, 그리고 그 모든 궤적 중심선상에서 시그널로 작용하는 ‘방언’ 또는 ‘바람’의 텔로(θέλωㅡ임의로)를 정리한 글이다. 따라서 이글은 앞서 작성했던 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나와 노우호 목사의 악령 방언(γλώσση)설은 다 옳은가? 그리고 성경의 괴물 ‘리워야단’과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연장선상에 있다. (1) 초대교회의 분열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화급한 문제는
스데반은 이교도(Ἑλληνιστής)였는가 더 보기 »
이 글은 동성애를 용인하고 묵인하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동성애 합법화의 저지선은 대개 관습적, 생물의학적, 심리학적, 법학적, 신학적 단계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심리학적 저지선이 무너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각종 친 동성애 법안 개정과 발효에(동성애 결혼법, 차별금지법 등) 가속도가 붙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저지선은 교회와 신학일 텐데, 도리어 일부 목회자와
이 글은 초대교회 원시 공동체들의 성령 인식 과정, 특히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독창적으로 인식했던 파라클레토스를 요약한 글이다. 우선 이번 주 성서일과 시편 가운데 이런 대목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성령강림절 성서일과에 웬 악어가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ㅡ시편 104:26 앞서 여러 차례 리바이어던 관련 글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괴
친애하는 친구분들이 감동을 많이 받은 영화인데, 위플래쉬에 대해 좀 미안한 비평을 해야겠다. 거기서 나오는 주인공 선생님이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말, “Good Job!”(참 잘했어요)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lol~ 위플래쉬(whiplash)는 채찍질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편없는 작품이지만 가능성 있는 부분을 캐내어 발견해주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칭찬해주는 방법 하나,
재즈를 곡해한 영화 위플래쉬(Whiplash) 더 보기 »
어벤져스(2015)를 관람했다. 이야기 구조와 편집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전투 장면 뒤로 보이는 ‘즉석 떡볶이’라는 글자나 필리핀 따갈로그 처럼 들리는 우리말은 반갑기보다는 내가 사대주의자임을 각인시킬 뿐인 영화. 그런데 딱 하나, 매우 흥미로운 개념 하나가 내포되어 있는 걸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걸 설명하려면 이야기를 조금 ‘스포’해야 한다. 스포주의! (1) 단독자 Vs. 독단자 어벤져스를 통한
19-20c 신학과 교회를 침몰시킨 예수의 자의식 더 보기 »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1919년)은 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중에 하나로 꼽을 정도로 센세이셔널 한 저서이다. 칼 바르트를 세상에 알린 이 책은 한 마디로 ‘초월적 하나님’ 앞에서의 ‘유한한 인간’인 자신의 고백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스위스의 초라한 탄광촌 사펜빌(Safenwil)에서 전혀 존재감 없던 목사였던 까닭일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이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잊어버렸을때, 칼 바르트의
성서일과(lectionary)는 3년을 주기로 회전한다. 3년 주기로 같은 성경 본문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처럼 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적 예시이다. 동시에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며 내가 선호하는 방법의 전부도 아니다. 그 주차에 해당하는 성서일과와 그해에 직면한 맥락이 일치하란 법도 없을 뿐더러 시대와 사회상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성서일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