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만큼 장례식
과거 평신도 신분으로 교회 행정 일을 본 적이 있다. 첫 번째 한 일이 교회의 조직 세우는 일이었다. 환경미화부, 복지부, 경조사부, 성례부.., 이런 식으로 나누어 교회 유지들을 분임케 하는 것이었다. 당시 결혼식과 장례식을 경조사부에서 맡고 있었던 것을 나는 장례식만 떼어다가 성례부에 분류를 해놓았다. 그랬더니 대뜸 성례부를 맡고 있는 양반이 “장례는 성례가 아닙니다!” 하며 교회 […]
과거 평신도 신분으로 교회 행정 일을 본 적이 있다. 첫 번째 한 일이 교회의 조직 세우는 일이었다. 환경미화부, 복지부, 경조사부, 성례부.., 이런 식으로 나누어 교회 유지들을 분임케 하는 것이었다. 당시 결혼식과 장례식을 경조사부에서 맡고 있었던 것을 나는 장례식만 떼어다가 성례부에 분류를 해놓았다. 그랬더니 대뜸 성례부를 맡고 있는 양반이 “장례는 성례가 아닙니다!” 하며 교회 […]
귀신 쫓는 장면이 금주 성서일과 본문이다. 요즘도 많이들 쫓나 모르겠다. 예수님의 축귀는 상징인가 실재인가? 자의든 타의든 요즘의 교회는 직접 악령을 쫓기보다는 심리요법 등으로 해결을 보는 것 같다. 심리 요법은 더 타당한가? (1) 악령 축출 체험 젊을 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중에 학생들에게서 악령 드러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A 학생에게 성경 구절 한 곳을
권세(권위) 있는 새 교훈으로 흔히 범하는 오류 더 보기 »
결론적으로 70인역(Septuagint) 번역자들이 이 독자적 정신성 단위 ‘독사’를 구약의 가봇(영광)에 대한 대응어로 채택해 온 궁극적 근거는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주’(shekinah) 할 수 있는 가장 우월한 정신 입자를 설명하기에 용이한 개념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쉐카이나가 존재의 양식이라면 독사는 일종의 그 존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 연관글1. 희랍어 독사(δόξα)가 어떻게 영광(Glory)이 되었나2. 플라톤이 독사(δόξα, 영광)를 싫어했던 경위에
독사(δόξα, 영광)가 현대 기독교인에게는 최상의 영예로운 영적 상태와 지위를 표명하는 어휘가 되었지만 플라톤(Plato)은 이를 아주 경멸하였다고 한다. ‘견해’ 또는 ‘의견’이라는 뜻을 지닌 이 독사의 개념을 앞서 오늘날의 언론 매체 사설 따위로 예를 들은 바 있다. (각 언론사 사설은 마치 독자적 견해인 것처럼 임하지만 언제나 자기 이념의 권역에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노선을 꾀하는 것, 그리하여 마치 독.자.적.인.
플라톤이 독사(δόξα, 영광)를 싫어했던 경위에 대해 더 보기 »
기독교인이 의미심장하게 사용하는 용어 ‘영광’을 희랍어로 독사(δόξα)라고 한다. 그러나 이 δόξα는 본래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의미로서의 ‘영광’으로는 용례의 빈도수가 낮은 용어였다. 그 쓰임새가 주로 opinion 즉 ‘견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독사’가 영광(Glory)으로 전용되기까지는 셉투아진트 번역자들의 공헌이 크다. 그들이 희브리어 카봇(כָּבוֹד, 영광)을 독사로 번역해놓은 까닭이다. 그들은 왜 ‘카봇’을 독사로 번역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사’가 기대함으로 (바라)본다!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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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한 법정 앞에 세워진 정의의 상이다. 팔뚝상 정의(Justice)의 심볼로 세워진 동상은 대개가 여신상인데 이 동상은 기이하다. 여신은커녕 상반신·하반신도 없고 팔뚝만 있다. 게다가 이상한 말이 적혀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 땅에는 정의를(???)”. 솟아날 구멍이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을 포함, 주로 법정 앞에 정의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지만 유럽에서는 교회, 학교에서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심볼이다. 이 여신의 이름은
처음 이곳에 이사왔을 때 과일과 떡을 돌렸다. 예배 때문에 시끄러울까봐서사실은 지네들이 더 떠들어 이다. 위, 아래, 옆집 다 돌렸는데, 옆집에서만 답방이 왔다. 아주머니께서 딸기까지 사들고. 그러면서 아내에게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나? 우아, 대단히 친절한 사람들이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격조있게 잘 지내었다. 어느날 저녁에 애들이 밖에서 들어오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어들어왔다. 집 앞에 누가 속에 있는
유년기에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나라 온 동네 구석구석을 언젠가는 빠짐없이 다 밟겠지…?’ 지형이나 지리에 대한 공간 감각이 부족한 연령기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마음에도 살 날에 관한 시간이 앞으로 밟을 지리에 대한 공간보다는 더 길게 느껴서였을 것이다. 정말로 전국의 골목 골목을 다 가볼 줄 알았지만, 현재 거주지에서 산
미문(美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 동안 구글 블로거를 사용했으나 목록 보기, 검색 목록 등 구독하기 불편하시다는 말씀들이 있으셔서 여기에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구글 블로거는 각 게시물의 공유자들이 많으신 관계로 폐쇄 하지는 않고 열어 놓겠습니다. 대신 새 글은 이곳에서ㅡ. 아직 이전 된 게시물들의 행간 자간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짬을 내어 계속 손보겠습니다. 많이들 활용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노우호 목사의 악령 방언(γλώσση)설은 다 옳은가? 이것이 이글 본 주제는 아니지만 성서일과에서 공교롭게도 방언 부분을 지나기에 요즘 이슈가 되는 노우호 목사님의 방언 관련 주장을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처음 이 분에 대해 생각할 때는 단순한 반(反) 은사주의자 정도로 선입견이 앞선 게 사실이지만 이 분이 나름대로 전면적인 반 신사도 입장을 취하다 그만 그 총체적 시각 속에 방언까지
노우호 목사의 악령 방언(γλώσση)설은 다 옳은가?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