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의 기원
아브라함의 계약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래와 같이 5단계 이상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일 계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상대적 시행착오를 의미한다고 앞서 일러두었다. 아래 그림에서 우측의 주황색은 그 계약의 단계별 변형을 – 즉 암시로부터 점점 베일을 벗는 – 추적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계약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래와 같이 5단계 이상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일 계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상대적 시행착오를 의미한다고 앞서 일러두었다. 아래 그림에서 우측의 주황색은 그 계약의 단계별 변형을 – 즉 암시로부터 점점 베일을 벗는 – 추적할 수 있다.
가인의 족보에서 마지막 후손은 두발가인으로 6번째 후손이다. 완전수 7번째 후손이 그의 족보엔 없다. 반면 죽은 아벨을 대신한 셋의 족보에서는 7번째 후손 라멕을 지나 8대손 노아까지 이어지는 동안 6번째 후손인 므두셀라가 계속 따라붙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가 마지막 종말의 순간까지 죽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아벨/셋으로부터는 6번째 후손이지만 아담으로부터는 7번째 완전수를 채우는
이번에 ISIS에 의해 이집트 기독교인 21명이 참수되는 것을 보며 문득, 만약에 우리나라의 통일교 교도, 신천지 교도들이 이슬람에 의해 집단 살해를 당하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아니, 2007년 7월 분당샘물교회 아프카니스탄 피랍 사태 당시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능히 짐작은 할 만하다. 비 기독교인의 경우 탈레반보다는 선교여행을 간 그들을
이 글을 읽기 전에 나는 이념적으로는 거의 극우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러둘 필요가 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고문기술자’로 더 잘 알려진 이근안 전 목사에 대해 언급하였다. 성서일과 주제가 ‘변화’였기 때문이다. 특히, 파문당한 그는 변화를 받긴 했던 것인가? 변화 받았는데 다시 돌아간 것인가? 아니면 아예 변화를 받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근안만이 아닌 우리
차별금지법은 좋은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기독교인이 차별금지법의 저항력을 완화하려면 차별을 하지 않으면 된다. 예를들어 무슬림에게 전도를 하면 그가 모욕으로 느끼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이슬람교를 전도했을 때 모독으로 느끼는 것에 상응한 것이다. 자기는 모독으로 느끼면서도 무슬림 개체만 싸가지 없는 악한 놈으로 간주한다면 본질상 차별일 것이다. 그들 권역 밖에 살면서 무슬림을 싸가지 없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은 스페인 르네상스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 만큼 많은 해석이 있지만 이 도상(圖像)에 대해 몇 가지 추가해 둘 나의 해석이 있다. (1) 14세기 실존 인물의 매장을 16세기 버전으로 대개 이 작품은 14세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곤살로 루이스라는 본명을 가진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을 재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16세기(1588년)였기 때문이다. 가스띠야 왕국의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은 전쟁화(battle-piece) 더 보기 »
지난주 본의 아니게 귀신 쫓는 행위를 격하시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마어마한 능력 행하는 분들이 지금 여기 오셔서 능력을 행하며 우릴 들었다 놨다 은혜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 앞서 모든 논지는 일시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 것만 같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종국에 혹시 그 능력 행하던 분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그때 이 논지는 여전히 유효할
과거 평신도 신분으로 교회 행정 일을 본 적이 있다. 첫 번째 한 일이 교회의 조직 세우는 일이었다. 환경미화부, 복지부, 경조사부, 성례부.., 이런 식으로 나누어 교회 유지들을 분임케 하는 것이었다. 당시 결혼식과 장례식을 경조사부에서 맡고 있었던 것을 나는 장례식만 떼어다가 성례부에 분류를 해놓았다. 그랬더니 대뜸 성례부를 맡고 있는 양반이 “장례는 성례가 아닙니다!” 하며 교회
귀신 쫓는 장면이 금주 성서일과 본문이다. 요즘도 많이들 쫓나 모르겠다. 예수님의 축귀는 상징인가 실재인가? 자의든 타의든 요즘의 교회는 직접 악령을 쫓기보다는 심리요법 등으로 해결을 보는 것 같다. 심리 요법은 더 타당한가? (1) 악령 축출 체험 젊을 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중에 학생들에게서 악령 드러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A 학생에게 성경 구절 한 곳을
권세(권위) 있는 새 교훈으로 흔히 범하는 오류 더 보기 »
결론적으로 70인역(Septuagint) 번역자들이 이 독자적 정신성 단위 ‘독사’를 구약의 가봇(영광)에 대한 대응어로 채택해 온 궁극적 근거는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주’(shekinah) 할 수 있는 가장 우월한 정신 입자를 설명하기에 용이한 개념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쉐카이나가 존재의 양식이라면 독사는 일종의 그 존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 연관글1. 희랍어 독사(δόξα)가 어떻게 영광(Glory)이 되었나2. 플라톤이 독사(δόξα, 영광)를 싫어했던 경위에